알아차림'이란 말의 정의는 ‘기억과 사유가 일치된 앎'이다
통찰이란 내적 겸양과 스승의 언어와 미세한 알아차림에서 온다
오늘은 내가 새벽에 심은 생각이라는 씨앗이다
이성이 마비된 자리에 자리 잡은 집단적 적대감은 상대를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존재로 환원한다.
갈등을 줄이는 길은 더 큰 목소리를 내는 데 있지 않고,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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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릇의 청정수에 한 방울의 오물이 떨어지면, 그 물은 폐수가 되는 것처럼, 무심한 마음에 미워하는 마음이 얹히면 분노가 되고, 가지고 싶은 마음이 얹히면 탐욕이 된다.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실체를 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 저울 위에 파리 한 마리가 앉게 되면 가리키는 눈금은 변함이 없겠지만 그 무게는 거짓이 된다.
알아차림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마음은 우리 삶에서 문제를 찾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알아차림 없이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삶이 마치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삶 속의 축복, 신비를 찾아볼 수도 있다. 이미 우리 곁에 있는 좋은 것들을 알아차릴 때, 감사함은 자연스럽게 피어나고, 삶은 한결 가벼워진다. 그러니 부족한 것에 대해 곱씹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우리 삶에 이미 존재하는 축복들을 조금 더 알아차려 보는 것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알고, 더 나아가 이해(理解)하는 길은 나의 감각의 지평을 확장 시키고, 그 경험으로 감성, 아니 감수성을 예민하게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 사유를 더하면, 우리는 통찰력(insight)을 키울 수 있다. 살면서, 문제에 직면하면 그걸 '탁'하고 알 수 있는 것이 통찰력이다. 이런 '알아차림'은 체험과 개념, 아니 경험과 이론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이란 말의 정의는 ‘기억과 사유가 일치된 앎'이다. 어려운 말 같지만, 기억은 체험에서 나오고, 사유는 개념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알아차림은 경험이나 체험에 개념이나 이론이 뒷받침되면 더 잘 작동된다. 그러니까 알아차리는 것도 조건이 맞아야 한다. 쉽게 말하면, 다양한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오늘도 열심히 나는 공부한다. 인문학도 과학이다. 그래 인문과학을 프랑스어로 Sciences humaines라고 한다.
통찰이란 내적 겸양과 스승의 언어와 미세한 알아차림에서 온다. 겸양은 나를 비우고, 내가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배우려는 자세에서 나온다고 나는 늘 생각했었다. 그리고 배울 때 필요한 것이 고전을 읽으며 스승의 언어를 익히는 것이다. 그때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해 우리는 조금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의 양이 늘면, 우리의 지평은 확장 되며, 신에게 로까지 초월할 수 있다. 여기서 초월은 내 담벼락을 넓혀 나아가면서, 신의 문턱까지 이르는 것이다.
AI 시대 살아남는 인간의 5가지 능력: 질문, 해석, 창의성, 현실 감각 그리고 책임이다.
§ 질문하는 능력
§ 의미를 해석하는 능력
§ 현실 세계를 다루는 능력
§ 창의적 결합 능력
§ 책임지는 능력
Ai는 강력한 도구이다. 그러나 도구는 사용하는 사람의 철학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망치를 들면 집을 지을 수도 있고, 창문을 부술 수도 있다. Ai 역시 마찬가지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의식이다. 의식이 중요하다. 의식(의식, consciousness)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과 외부 환경을 인식하고 느끼는 정신 작용으로, 인지, 감각, 기억을 포함한다. 다르게 말하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다. 철학적으로는 자각을 의미하며, 신경 과학적으로는 뇌의 정보 통합 작용으로 본다. 가장 단순하게는 내적, 외적 존재에 대한 알아차림(자각)을 의미한다. 컴퓨터는 계산을 처리한다. 회로 속에서 기호를 마구 뒤섞는다. 그런데 그 기호를 뒤섞는 것으로 의식에 도달할 수 없다. 의식과 신념이 생기려면 인과적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자의식이 뇌 속에서 이리저리 튕겨 다니는 데이터 무리가 아니라, 인과적 메커니즘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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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는 것, 앎 또는 지식이 '나'이다. 그것은 내 삶의 방식이고, 나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지식은 내 삶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가장 잘 통제할 수 있게 한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앎은 기억의 기능이나 마음속에 저장된 수많은 정보의 총체가 아니다. 지식과 정보는 다르다. 그리고 앎, 알아차림은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다. "'앎'은 저장된 수많은 정보를 분류하고 추려내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참다운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여과기이다." 어렵다. 좀 각도를 달리해서 말해본다.
김정운 교수에 의하면, 생각은 지식-정보-자극이라는 삼각 편대로 이루어진다. 지식(knowledge)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일 뿐이다. 새로운 지식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면, 이제까지 형성된 지식 이외의 것을 습득해야 한다. 정보는 의미가 부여된 자극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극만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이 지각한 자극들에만 의미를 부여한다. 해석이란 말이 의미 부여의 행위이다. 이렇게 해석을 통해 의미가 부여된 자극을 정보라고 부른다. 문제는 정보는 혼자서 해석될 수 없다. 반드시 다른 정보와 관계 속에서 설명된다. 그러니 좀 알려고 해야 한다. 남이 하는 말만 받아들이면 실수한다.
부국강병을 위한 관자, 즉 관중의 정책과 지혜를 담아 쓴 책인 <<관자>>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스승의 가르침에 제자는 공손한 태도와 겸허한 마음으로 배운 바를 극진히 해야 한다." 이런 태도를 '소수시극(所受是極)'이라 한다. 그다음은 배운 지식 그 자체에 만족하지 말고, 지식과 삶이 연결되는 지점을 찾고, 또한 그걸 글로 쓰고 실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배운 것을 글로 쓰는 훈련을 해야 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거일반삼(擧一反三), 하나를 알려주면 나머지 셋을 안다"는 말을 했다. 하나를 배워 셋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배움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읽어야 한다. 그리고 배운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지혜, 통찰력으로 깨어나야 한다. 그게 공부하는 자세이다.
다른 식으로 말해 본다. 우선 내가 변해야 한다. 변화하려면, 정보를 습득해서 그걸 내 것으로 만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변화를 영어로 하면 transformation이다. 이를 풀어 보면, information(정보)→in(안) + formation(형성)→transformation(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정보를 안으로 형성해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학습(學習)이다. 이 말에서 습(習)이란 "어린 새가 날개를 퍼드덕거려 스스로 날기를 연습한다"이다. 그것도 100번 이상 연습한다는 것이다. '學'이 정보 습득이라면, '習'은 배운 것을 익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공부'라고도 한다.
그래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은 두 가지 층위가 있다.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아는 지식이 있고, 그 사실을 오랜 경험과 습(習)을 통해 몸과 정신으로 아는 지식이 있다. 이를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그노시스'라 했다. 이 '그노시스'는 씨앗과 같다. 씨앗은 모든 지식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일상에서의 수련은 자신의 심연에 존재하는 이 씨앗을 발아시키려는 행위이다. 농부가 과실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하는 일들과 같다. 땅에 심을 알맞은 품종을 정하는 혜안과 시기적절하게 씨를 뿌리고, 지연의 섭리대로 발아하기를 기다리는 인내와 같다. 씨앗은 가능성이다. 내 안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일이 일상의 수련이다. "씨앗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미래를 상상하는 자에겐 열매를 맺는 과실 나무이며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느티나무이며 동물들이 뛰놀 수 있는 숲이다."(배철현) 동의한다. 내 씨앗은 어떤 가능성일까? 나에게 매일 매일의 글쓰기는, 깊은 심연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내 삶에 가장 어울리는 꽃을 피우기 위해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요가를 하는 것처럼.
3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오늘"을 살지 않을 것이다. "내일은 없다. 오늘이 좋습니다." 내 만트라이다. 이 만트라를 소환하면, 지치고 무기력하며 화가 났는데 불현듯 제가 오늘만 산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감정과 생각이 바뀌며 편안해 진다. 어떻게 생각과 감정을 바꾸는가? 내일이 없으니 오늘 있는 힘을 다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나를 옭아매던 어떤 한계에 갇힐 이유가 없다는 생각과 감정을 다시 갖게 되고 일상의 습관을 놓치지 않는다. 가끔 게으름 피우고 싶은 마음을 각성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상대가 나를 괴롭히면 내일은 내가 없을 테니 그가 원하는 대로 다 받아주어도 된다고 감정을 바꾼다. 신발은 인간 존재 자체이다. 신발을 신고 살아야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정채봉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지 않았네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오늘도 내가 나를 슬프게 했네
씨앗 이야기를 이어간다. 천국을 씨앗과 비교하는 복음서들을 읽어 보았다. "천국은 모든 종자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다. 만일 그 씨가 준비된 토양에 떨어지면, 그것은 많은 풀을 내어 하늘의 새들이 쉼터가 될 것이다."
예수는 천국을 겨자씨라고 말한다. 겨자씨는 유대인들이 키우기를 꺼려 할 정도로 주변의 풀들을 잡초로 만들어버리는 유해한 식물이다. 이를 오늘날의 말로 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악성 컴퓨터 바이러스와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혹은 천국은 겨자씨처럼, 미미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정원의 잡초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였다가 곧 널리 퍼져 나가 그것에 닿는 모든 것을 잡초로 만든다. 사람들이 잡초를 뽑으려고 하면 할수록 잡초는 더 빨리 퍼져 나간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자기 혁명은 겨자씨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삶을 통해 상대방이 천국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천국을 경험한 자가 아니다. "겨자씨는 어떤 것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버려서 나무가 되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마태, 13:31)
인간이 신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내면에 인간의 본능과 구별되는 '생명을 주는 영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혼이 '씨앗을 품은 이성'이다. 멋진 표현이다. 내 안의 이 씨앗을 지키는 것이 "영혼을 최선의 상태"(아리스토텔레스)로 유지하는 일인 것 같다. 인간은 이 씨앗을 통해, 육체와 정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인간은 이 씨앗을 통해 신적인 로고스와 소통한다. 여기서 로고스는 삼라만상을 작동하게 만드는 적극적인 이성이자 우주의 정신이다. 다시 말하면 로고스는 물질로 구성된 우주를 움직이는 신 혹은 자연의 우주 작동 원리이다.
씨앗 같은 지식을 얻는 공부는 자신의 삶을 위한 최적의 씨앗을 선별하고 그 씨앗을 자신의 삶이라는 토양에 깊이 심고 가꾸는 일련의 과정이다. 공부에서 제일 우선해야 할 것이 품종을 선택하는 일이다. 우리 대부분은 주변 환경이나 주위 사람들의 조언으로 자신에게 하나뿐인 고유한 삶의 씨앗을 결정한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 고유한 나무가 되기 위해, 최고의 품종을 선택하기 숙고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다른 이에 의해 강요된 씨앗을 선택하는 행위를 우리는 무식, 또는 무지라고 한다. 그 땅에 어울리는 씨앗을 아는 능력이 앎, 알아차림이다. 그건 단순하게 습득한 지식이 아니라, 오랜 관찰과 경험이 낳은 자식이다.
오늘은 내가 새벽에 심은 생각이라는 씨앗이다. 그 오늘이 모여 우리들의 인생을 이루는 것이다. 그 인생이라는 나무를 가꾸기 위해, 오늘은 자신에게 알맞은 품종을 선택하고 그 씨앗이 발아하도록 인내하면서 가꿀 뿐이다. 최선의 삶을 위해 나에게 주어진 오늘은 일상(日常)이다. 내가 그 일상을 응시해 최선을 발견한다면, 그 일상은 특별한 일상인 비상(非常)이 된다. 만일 내가 그 일상을 방치하거나 흘려보내면, 그 일상은 진부(陳腐)가 된다.
배철현 교수는 "인생이란 우리가 될 수 있고 그래서 되어야만 하는 그것을 성취하려는 마라톤 경주다"라면서, "인생이란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선정한 분명한 목표지점이 있어야 하며, 그 지점을 위해 매일 매일 자신이 행하고 있는 방향을 점검하고, 오늘이란 시간에 마쳐야 할 구간을 정해야 한다. 자신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목표지점을 발견하지 않는 사람은 무식하며, 어렴풋이 발견하였지만, 최선을 경주하지 않는 사람은 나태(게으름)하고, 남들이 좋다는 경로에 안주하는 사람은 비겁하다"고 했다.
오늘을 어떻게 살까? 에픽테토스의 <<인생수첩>>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나침반으로 삼는다. "세상에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과 조절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조절(調節)이란 자신의 의지와 행위로, 최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재 상황을 수정하려는 시도이다.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과 조절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지혜(智慧)이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자신의 정성을 몰입하는 것이 현명(賢明)이다.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 제논은 무역상을 하다가 몰락하여 빈털터리가 된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의연한 몸가짐과 자신조차도 존경하는 숭고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외부의 야유와 불행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의 불행을 자신의 숭고함과 위대함을 드러내는 불쏘시개로 전환시켰다. 제논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여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듣고 철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후에 당시 유행하던 견유학파의 회의주의 철학을 넘어선, 우주적 자아로서의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이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해야 하는 의무를 강조하는 스토아 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제논의 힘은 조난사고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과 하루의 거룩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그것을 마주한 인간의 역량을 측정하는 시험(試驗)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가치중립적이다. 그것들은 행운이고 동시에 불행이다. 그것들은 희망이며 절망이다. 그러나 내가 그 사건-사고에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것이 행운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할 것이다. 태도(態度)가 중요하다. 태도는 곰(熊)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4
최근 우리 사회는 ‘갈등'이라는 말 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균열을 드러낸다. 정치적 진영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규정하고 배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혐오와 낙인이 일상처럼 반복되고, 현실에서도 편 가르기는 낯설지 않다. 이러한 분열은 단순한 정치적 차이를 넘어, 상대를 온전한 존재로 존중하는 태도가 결여된 탓일지도 모른다.
이 현상을 단순한 의견 차이나 이해관계의 충돌로만 볼 수 있을까? 이는 사실 위에 ‘나’와 ‘내 편'이라는 기준이 개입되며 해석이 과잉 증식하는 정신 작용, 즉 ‘망상 분별(妄想 分別)’의 집단화에 가깝다. '망상 분별'은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가령, 사법부의 판단과 교차 검증을 통해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한 선거 결과조차, ‘내 편이 졌다'는 결과 앞에선 ‘부정하게 조작 되었다'는 거대한 음모론의 해석으로 덧씌워진다. 이러한 자의적 해석은 곧 확고한 신념이 되어 근거 없는 불신과 사회적 분노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낸다.
특히 오늘날에는 ‘무엇이 사실인가’ 보다 ‘누가 말했는가’ 가 더 중요해지면서 진실은 뒤로 밀려난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에서 아이들이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혀 서로를 ‘짐승'이라 낙인찍고 파멸로 치닫는 과정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집단적 타자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성이 마비된 자리에 자리 잡은 집단적 적대감은 상대를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존재로 환원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칼 포퍼가 경계한 "닫힌 사회"의 위험을 직시해야 한다. 포퍼에게 "닫힌 사회"란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 진리로 간주해 비판과 수정을 거부하는 사회다. 반면 그가 제시한 "열린 사회"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 즉 내 신념이 언제든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에 노출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핵심이다. 다른 목소리를 적대시하지 않고, 검토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며, 대화를 통해 검증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이처럼 '망상 분별'에 갇힌 사회는 결코 반증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 진영의 논리는 성역이 되고, 이를 반박하는 사실은 ‘배신'이나 ‘가짜'로 치부된다. 포퍼가 말한 합리주의는 끊임없는 비판을 통해 오류를 수정해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갈등을 줄이는 길은 더 큰 목소리를 내는 데 있지 않고,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이 분열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불암사 주지이신 법인 스님의 해법은 명료하다.
§ 먼저, 내가 접하는 정보가 ‘사실'인지, 내가 덧붙인 ‘해석'인지 구분하려는 성찰이 필요하다. “지금 나는 무엇을 투사하고 있는가”라는 짧은 질문은 생각의 폭주를 멈추게 한다.
§ 또한 상대를 집단이 아닌 개별적 인간으로 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해는 거창한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데서 출발한다. 거대 담론의 실현보다 타인의 구체적인 고통을 줄여 나가는 것이 정치가 회복해야 할 본질이다.
보조 지눌은 “망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알아차림이 늦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했다. 지눌의 ‘알아차림’과 포퍼의 ‘비판적 합리성’은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 본질은 주관적 확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타자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려는 용기에 있다.
지금 나의 분노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그 해석은 과연 사실에 기반한 것인가? 이 질문들이 닫힌 망상을 깨고 열린 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찰은 현실에서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번 지방 선거는 그러한 변화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번 선거 결과를 떠나, 이제는 정치 현장이 단순한 진영 대결을 넘어 건강한 비판과 대안이 공존하는 민주주의의 장이 되어야 한다. 나와 다른 의견을 배척하기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겸허함으로 타자를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망상의 늪을 넘어 열린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양지만큼 음지가 있고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은 법이다. “과유불급 물극필반(過猶不及 物極必反)"이라 했다. 미치지 못함보다 더 위험한 것이 지나침이다. 그리고 만물이 극에 이르면 기우는 법이다. 보름달이 된 달은 조만간 작아져 초생달이 된다. 만조의 바다는 썰물로 갯벌을 드러낸다. 힘 세다고 더 많이 가지고 더 행복한 것이 아니라, 연대하고 책임지며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이어야 한다.
[후략(後略)]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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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한표 교수 |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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