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를 빼앗은 아들, 나라를 무너뜨린 여희의 야망

제환공 다음으로 중원의 패자가 된 인물은 진문공(晉文公)이다. 진(晉)나라는 황하강 상류, 중원의 북쪽 태행산맥을 끼고 있었다. 훗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의 진(秦)나라는 그보다 서쪽 유목민의 나라로서 진(晉)과는 다른 나라이다.
진문공은 원래 장자의 신분인데도 승계 싸움에서 밀려나 19년이나 떠돌이 망명 생활을 하다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 겨우겨우 권력을 잡더니, 결국에는 천하를 제패하여 방백에 올랐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고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진문공의 아버지 진헌공에게는 어미를 달리하는 아들이 셋 있었다. 바로 중이(重耳), 이오(夷吾), 신생(申生)이다. 훗날 진문공이 되는 중이는 그중 맏이로서 견융의 여인에게서 났다. 공자 중이는 외모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키가 크고 얼굴이 귀하게 생겼다. 눈 하나에 눈동자가 둘씩 달렸다. 가슴은 넓고 갈비뼈 늑골이 통째로 하나이다.”
인류 역사상 이런 인간이 없다. 기록에서는 이를 변협(骿脅, 통으로 된 갈비뼈)이라고 하였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는 과장이 붙기 마련인데, 파란만장한 풍운을 헤치고 중원의 패자가 된 진문공에게 이 정도는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이런 외모와 어머니가 견융 여인이라는 기록으로 봐서 중이는 일반 한족(漢族)이 아니고, 아랍계 서역인의 혼혈일 것이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색목계 여인은 이국적 취향이 있는 중원의 호사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오죽했으면 궁형을 당해 성 불구자가 된 사마천도 이렇게 말했다.
“회족(回族) 여인은 자태가 요염하다. 피부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옥처럼 청결하여 중원의 여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산에는 개암나무 산유진 (山有樄)
진펄에는 감초 습유령 (隰有苓)
누구를 그리워하나 운수지사 (云誰之思)
서방의 미인이다 서방미인 (西方美人)
그 미인은 피미인혜 (彼美人兮)
서방 출신이다 서방지인혜 (西方之人兮)
공자의 《시경》, 〈국풍〉 중 패풍(邶風)편, ‘간혜(簡兮, 씩씩한 무사)’
‘산에 있는 개암나무’는 우뚝 솟은 남성을 말함이고, 대귀(對句) ‘진펄의 감초’는 습지를 에워싸고 있는 부드러운 풀로서 여성을 상징한다. 패풍(邶風)이니 패나라 노래이다. 패(邶)라는 나라는 글자의 모양부터가 북방(北方)을 연상시킨다. 패(邶)는 황하를 서북방으로 건넌 초원 지대에 있었다. 중원에서는 이들을 총칭해서 서융(西戎)이나 북적(北狄), 또는 호인(胡人)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의 외모도 중원의 한족과는 확실히 달라 푹 꺼진 눈 깊숙이 회색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말도 달랐다. 중원의 억양과 다른 초원의 말씨가 섞였고 말이 느렸다. 대신 표현은 진중하고 그만치 상대에게 믿음을 준다.
서책에서 표현된 중이의 모습을 바꾸어 말하면,
“움푹 들어간 눈매가 그윽하여 어디를 살피는지 도대체 종잡을 수 없고, 두둑한 배짱으로 사람을 포용하였다,” 이런 정도일 것이다.
둘째 공자 이오(夷吾) 또한 오랑캐 소융(小戎) 여인의 소생이나, 외모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없다. 셋째 신생은 이들과 달리 제나라 환공의 큰딸인 제강(齊姜)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기가 찬 것은 그녀가 바로 아버지의 여자라는 점이다. 그것도 정실부인이다.
진헌공의 아버지 진무공(晉武公)은 늙을수록 여자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다. 어디 좋은 것이 없나? 늘 그 생각이었다. 말년에 미인이 많다고 알려진 제나라 공실에 청혼을 넣어 제환공의 장녀를 아내로 맞았다. 바로 제강이다. 늙은 진무공은 젊고 예쁜 데다, 신분까지 고귀한 제강을 아내로 맞았으나 정작 남자구실은 신통치 않았다. 그에 비해 제강은 아름답고 색정 또한 남달랐다. 타고난 정염에다 해결될 수 없는 욕구가 오히려 그녀를 더욱 농염하게 하였다. 이런 낌새를 차린 젊은 세자가 대담하게도 제강에게 눈독을 들였다.
마침 진무공이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는 일이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신통찮던 노인이 허리까지 다치고 보니 남자구실 하기는 다 글렀다. ‘흐흐흐, 영감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저런 찰진 밭을 그냥 놀릴 수야 있나!’
부드러운 풀이 무성한 방목지가 젖과 고기를 주듯이, 여자의 밭은 쾌락과 자식을 안겨준다. 아무리 그렇다고 쳐도 임금인 아버지의 여인을 욕심내니 그야말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인물이다. 과연 세자는 배포가 커서 난세의 군주로 손색이 없었다. 명목상 임금은 진무공이었으나 벌써 사람들의 관심과 아부는 세자에게 쏠렸다. 세자가 밤이면 제강의 침소에 숨어 들어가 어떤 짓거리를 하든지 문제 삼는 이가 없었다. 금단의 열매에 푹 빠진 세자는 날마다 밤출입에 나서고, 궁인들은 길 안내를 자청하였다.
세자의 말마따나 찰진 밭이라 그랬는지, 제강이 덜컥 임신까지 하였다. 애를 낳되 임금이 모르게 낳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대궐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병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궁 밖으로 나가 신씨(申氏) 성을 쓰는 대부의 집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다. 낳은 아이는 그대로 그 집에서 기르게 하고 아예 아이의 이름까지 신생(申生)이라고 지었다. 허리를 다쳐 자리보전하던 진무공은 ‘골골 팔십’이라고 그 후에도 5년이나 더 살다 죽었다. 마침내 진무공이 세상을 떠나자 세자는 ‘얼씨구나’ 하고 아버지의 정실인 제강을 자기 부인으로 삼았다. 오늘날의 윤리관으로 보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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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생성 이미지 |
서융(西戎), 또는 흉노족이라고 불리던 초원의 유목민은 형제가 죽으면 뒤에 남은 형이나 아우가 그 아내를 차지하였고, 특히 족장이 죽으면 후계자가 정실을 제외한 후궁이나 첩을 고스란히 차지하는 풍습이 있었다. 우리나라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부여족은 이른바 형사취수(兄死取嫂,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한다)의 풍습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싸움터에서 죽은 자들의 아내는 살아 돌아온 남자들이 차지하게 마련이다. 돌아온 사내들은 다투어 전우의 아내부터 챙겼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청장년 남자의 사망률이 높았던 유목민 사회에서 죽은 형의 재산과 어린 자식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고 묶어둬야 하기에 어떻게 생각하면 필요한 풍습이었다.
아비의 죽음을 고대하던 세자가 마침내 군주로 등극하였다. 바로 진헌공(晉獻公)이다. 이때 큰 공자 중이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으며 둘째 이오도 열아홉 살로서 이미 성년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군주는 이 둘을 제치고 사랑하는 제강의 아들인 다섯 살짜리 신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진헌공이 그토록 사랑하던 제강은 오래 살지 못했다. 딸 하나를 더 낳다가,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덜컥 죽고 말았다. 크게 상심한 진헌공은 대신 영토 확장에 몰두했다. 즉위 15년부터 곽(霍), 경(耿), 위(魏), 우(虞), 여(驪) 괵(虢) 등의 주변국들을 정벌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멸망한 부족 국가 중 여(驪)나라는 원래 산융(山戎)의 일족이다. 이때 진헌공에게 패망하고 사직을 닫았다. 아름다운 두 딸도 진헌공이 차지하였다. 큰딸이 여희(驪姬)이며 작은딸은 소희(少姬)이다. 그중 여희는 절세미인이면서 교태까지 갖췄다. 무엇보다 헌공과 여희는 함께하면 할수록 힘을 얻고 원기가 충만해지는 천생의 짝이었다. 둘의 관능은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았다. 많은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짝을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데 여희는 진헌공에게 바로 그런 여인이다. 그녀는 지금껏 알지 못했던 세상으로 남자를 이끌었고, 몇 시간씩 쾌락을 주었다. 더하여 묘한 능력과 지혜까지 갖췄다. 진헌공이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면 그럴듯한 의견을 피력했고 군주는 ‘과연, 그렇군’ 하고 공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자는 죽은 제강을 까맣게 잊고 잠시라도 여희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진(晉)의 주인이 헌공이라면, 헌공의 주인은 여희였다. 여융은 여자 하나로 진을 굴복시킨 셈이 되었다.
이듬해, 그녀는 남자의 사랑에 보답하듯, 아들 해제(奚齊)를 낳았다. 정복자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고 아들까지 낳자 여희는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목표가 생겼다. 아들을 진나라 군위에 올리는 것이다. 그 길만이 부모를 죽이고 나라를 침탈한 진(晉)에 대한 복수라고 여겼다. 우선은 세자 자리에 있는 신생이 목표였다. 세자가 부왕에게 보낸 음식에 독을 투입하여 누명을 씌웠다. 신생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남은 공자들도 위기를 느꼈다. 중이는 책(磔)나라로 망명했고 이오는 양(梁)나라로 도망갔다.
자연스레 여희의 소생인 해제가 세자가 되었다. 진헌공 26년이었다. 모처럼 강주성은 화목하고 조용하였다. 스산한 가을바람에 실려 계절이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얼마 후, 진헌공은 제환공이 주도하는 규구(葵邱) 땅 회맹에 참석하고 돌아오다가 한질(寒疾)에 걸렸다. 한질은 풍토병의 일종인데, 당시로서는 쉽게 넘길 수 없는 질환이었다. 군주에게는 침과 부항 같은 외적인 치료도 금물이었다. 저절로 낫기를 기다리면서, 약만 쓰다가 병이 깊어져 결국 유명 한마디 없이 세상을 떠났다.
세자 해제는 겨우 열한 살이었다. 명색이 세자인 만큼 해제가 군위를 잇는 것은 당연하였으나, 모후조차 세력 하나 없는 패망한 나라 출신이라 정국은 살얼음판을 걷듯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사단은 출상하던 날 터졌다. 전통적으로 진(晉)은 황하 이남 출신과 하북 출신 간에 알력이 있었는데, 하북 출신 이극(李克)이 군사를 동원하여 상대를 주살하였다. 그런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피를 본 군사들이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휩싸였다.
“만세…! 간신들은 죽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죄 없는 세자를 모함한 놈들을 척살하자.”
“가만! 그보다 더 급한 게 있다…. 이 모든 게 다 임금을 치마폭에 싸고돈 오랑캐 계집 때문이다. 그 계집부터 죽이자!”
혼란 중에 세자는 어느 칼날 아래선지 목숨을 잃고, 여희는 후원 연못에 몸을 던져 자진하였다. 진헌공이 세상을 떠난 지 겨우 한 달 반 만의 일이다.
졸지에 군위가 비었다. 장성한 공자가 둘이다 보니 의견도 둘로 갈리고 이런저런 파쟁이 벌어졌다. 누구는 중이를, 누구는 이오를 주장하고, 또는 둘을 한 자리에 불러 담판을 짓자는 의견도 있었다. 자칫 썩은 동아줄을 잡았다가 멸족을 당할 수도 있는 중차대한 일이었기에 저마다 물밑에서 눈치를 살피느라 의견만 분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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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완 (韓 莞) 작가 |
※저자 한완은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74-1982 영천시 교육청에서, 1985-2014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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