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소설 춘추오패] 제22화. 내가 중원천하에 방백(方伯)이다

김백 기자 / 기사승인 : 2026-09-19 08: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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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를 맞이한 패자, 마침내 천하의 방백이 되다
19년의 유랑 끝에 이룬 패업, 그리고 영원한 작별

 

 


이듬해 6월에 정나라의 천토(天土) 땅에서 주양왕과 열국의 제후가 함께하는 다자간 국제회의 회맹이 열렸다. 천자가 제후의 하례를 받는 예법이 《명당부(明堂賦)》란 기록에 나와 있다. 천자가 머무는 방은 문이 36개, 창이 72개이며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제후들이 각기 정해진 방향대로 도열하고, 그나마 변방의 오랑캐들은 따로 방밖에 줄을 세운다고 했다. 이날 천토의 회맹에 참석한 열국은 진(晉), 송, 제, 정, 노, 진(陳), 채, 주, 거, 위나라 등 10여 국이었다. 이른바 G10인 셈이다. 주양왕은 그해 7월께에 천토 땅에 당도하였다. 그런데 공자의 《춘추(春秋)》에서는 이를 달리 기록했다.
“천자가 하양에서 수렵(狩獵, 사냥)하였다.”
공자가 활약한 시기는 BC 480년, 춘추시대의 종반기이다. 엄연히 주 왕실이 건재한 시절이었고, 공자 자신부터 봉건 군주제 말고는 다른 정치 체제를 알지 못했기에, 천자의 존재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외경의 존재였다. 그 천자가 제후의 부름을 받고 달려가는 이상한 행동 따위는 예법에 없다. 그래서 천자의 행차를 ‘수렵’이라고 달리 표시한 것이다. 공자가 생각하기엔 천토의 회맹이야말로 실로 개탄스러운 망조였다. 왕실을 옹위한다는 패자가 오히려 천자를 업고 절대권을 행사하는 월권을 자행하고 있다. 바야흐로 시대가 점차 요상해지고 있었다.
진문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20리 밖에 나가 주양왕을 영접하였다. 제후들은 관을 쓰고 예법에 따라 천자에게 하례를 드렸다. 천자를 모시는 절차는 장엄해야 하며, 예(禮)는 간소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몸에 두른 패옥이 챙챙거리며 음악 소리를 연상케 하였다. 진문공은 따로 주양왕에게 성복 전쟁의 전리품으로 말 구백 필과 보졸 천 명, 그리고 무기와 갑옷 열 수레를 바쳤다. 천자는 한껏 칭찬하였다.
“방백 제환공이 세상을 떠난 후 남방 오랑캐가 버릇없이 굴더니 이제 진후(晉侯)가 왕실의 위신을 세웠구려. 짐이 어찌 숙부를 의지하지 않으리오. 방백으로서 더욱 왕실을 보위하시라.”
왕실의 입장에서는 초나라를 제압한 것은 ‘혼돈’에 대한 ‘질서’의 승리였다. 진(晉)은 원래 왕실과 같은 희(姬) 성을 쓴다. 그래서 천자는 진문공을 숙부라고 높여 부른 것이다.
이날은 진문공의 일생 중 가장 영광스러운 날로 기록되었다. 그에 비해 천자로서는 딱히 편치만은 않은 자리였다. 편한 게 다 무엇인가? 오늘 회맹의 자리에서 누구보다 가장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바로 천자이다. 제후들의 몸가짐은 여전히 공손했고, 건네는 말씀은 예의가 발랐지만, 누구도 왕의 질문에 먼저 대답하는 이가 없이 진문공의 눈치를 살폈다. 이래저래 천자는 겉으로만 공손한 제후들을 보면서 허울뿐인 왕실의 권위를 실감하고 있었다.
얼마 후 진문공은 성복에서 서로 싸웠던 초성왕에게 많은 선물과 함께 사신을 보내 우호 조약을 청하였다. 초성왕은 탄식하였다.
“진(晉)의 군주는 나이 육십이 넘어서 임금이 된 인물이다. 하늘이 그에게 행운과 수명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전쟁에서도 그는 적은 군사로 우리를 이겼다. 지난날 그를 보면서 ‘사람 좋다’라고만 알았는데 결단도 대단하구나. 과인은 그와 적대할 생각이 없다.”
함께 우호 조약을 체결하였다. 남방과 북방을 대표하는 강대국 간 평화협정이다. 이로써 천하는 당분간 평화를 찾았다. 진문공은 한때 인연을 나 몰라라 하지 않았고, 초성왕은 두드리면 울리는 종과 같이 상대의 호의에 반응하는 성품이었다.

 

▲AI 생성 이미지


천토의 회맹 후 3년이 지난 어느 가을날 위주는 평소 즐기던 술에 만취하여 수레에서 떨어졌다. 그는 망명파 중에서도 손꼽히는 용사이다. 좋고 싫은 심사를 감추지 못하는 성품에다, 예사로 주량을 넘겨 마시는 술버릇이 있었다. 그날도 술주정을 부리다가 말 뒷발에 채었다. 젊은 시절 생고생에 몸을 상한 탓인지 며칠 후 피를 토하고 죽었다. 위주가 진문공으로부터 받은 봉토가 위읍(魏邑)이다.
훗날 진(晉)에서는 육경(六卿)이라고 하여 여섯 유력 성씨들이 득세하였다. 위(魏), 한(韓), 조(趙), 지(智), 범(范), 중행(中行)씨이다. 그중 지씨, 범씨, 중행씨는 일찌감치 제거되었고, 위씨, 한씨, 조씨는 각기 분리되어 나라를 세웠다. 전국시대가 되자, 대륙은 전국칠웅의 시대를 열게 된다.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 초(楚)와 훗날 이들을 병합한 진(秦)의 7국(戰國七雄, 전국칠웅)이 천하를 다투게 되는데, 놀랍게도 진(晉)에서 분리된 위, 한, 조가 모두 전국칠웅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이 모두 진(晉)에서 나왔기에 삼진(三晉)이라고 불렀다. 이들 중에 위나라는 위주의 후손들이고, 조나라는 조쇠의 후손들이다. 진문공의 치세는 8년으로 짧다면 짧았으나 그 영향은 컸다. 이들은 대별산맥의 척박한 분지에서 발원하여 싸우고 빼앗는 전투와 권모술수에도 능하여 이웃을 속이고 병합하는 데 거침이 없었기에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 후 몇 달이 지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호언이 세상을 떠났다. 진문공에게 위주와 호언의 죽음은 단순히 의지하던 신하를 잃은 상실로 끝나지 않았다. 한낱 서출 공자의 신분으로 태어나 누구보다 힘든 세월을 함께하였고, 누구보다 많은 성취를 이룬 동지들이다.
이제 그들의 시대는 흘러갔다. 동짓달 겨울 하늘같이 푸르던 이상은 어느새 빛바래고 고루한 사상이 되어 있었다. 세상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천하 제패의 야망도 이쯤에서 멈출 수밖에….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것은 장삼이사(張三李四, 장씨의 셋째와 이씨의 넷째라는 뜻으로 평범한 백성) 하찮은 백성이건, 설사 천자라도 다르지 않았다. 그저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생이란 강줄기가 바다를 향해 줄달음치는 것같이 한 번 흘러간 물은 다시 돌릴 수 없고, 마지막 순간에는 예외 없이 한숨과 회한이 남는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이 세상의 영광을 이룬 만치 떠나는 길이 더욱 허망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은 남았다. 이승은 이렇게 막을 내릴지라도 분명 다음 세상이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이 어찌 오늘 공자 중이, 진문공의 생애만으로 끝날 것인가? 한층 인재를 양성하여 다음 세대를 준비하였다. 죽은 호언의 자리는 극예의 아들 극결(郤缺)로써 채웠다. 극예는 여이생과 함께 진혜공의 심복으로서 진문공 초기에 제거된 세력이다. 그 아들을 중용하여 오래된 원한을 청산하고 극씨(郤氏) 가문을 감싸 안았다. 인간에게 선악에 대한 분별의 재능을 부여한 것은 하늘의 배려이다. 그렇더라도 선이라 믿고 결과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도 있고 악이라고 두려워하면서도 결과적으로 보니 좋은 결과일 때도 있다. 선악의 구별조차 모호한데 이긴 자의 관점에서 단정하고 끝내 배척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길일까?
“시대에 따라 가슴도 열어야 한다. 자고로 인간의 낡은 옷은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법!”
이런 포용의 조치로 극결은 다음 대 진양공 시절의 충신이 된다. 바야흐로 불멸의 가치인 용서와 화합의 계절이다.
강주(絳州)성에는 밤에 문을 닫아거는 일이 없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 가는 사람이 없었다. 해마다 풍년이 들어 늙은이 젊은이 가릴 것 없이 배를 두드리며 노래했으며, 나라의 부역이 있으면 서로 다투어 힘을 보탰다. 병영에는 병장기와 마필이 넘쳐났고 창고에는 곡식과 마초가 그득했다.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그도 어느덧 70세의 고령이었다. 되짚어 보면 43세에 망명 생활을 시작하여 19년을 유랑으로 보내고 62세에 군위에 올라 8년을 재위하였다. 8년의 통치, 얼마나 짧은 기간인가! 그래도 믿을 수 없을 만치 많은 일을 성취하였다. 진문공은 병석에서 조쇠, 선진, 양처보, 호사고 등 신하들을 불렀다.
“경들은 세자 환(驩)을 임금으로 섬기고 과인이 이룬 패업을 결코 다른 나라에 뺏기지 않도록 힘쓰라!”
그 말을 할 때 진문공의 눈이 번쩍 빛났다. 중원 천하를 호령하는 패권국가! 평생을 바쳐 소원하고 갈망하던 패업! 결국 이루었다. 아니, 아직은 한참이나 멀었다. 영웅은 세상을 향해 평생 추구하던 이념을 그런 씨앗 같은 언어로 남았다.
진문공은 자식들이 후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미리 조치를 취해 두었다. 공자 옹(雍)은 진(秦)나라에서, 공자 낙(樂)은 진(陳)나라에서 벼슬을 살고 있었다. 공자들을 이웃 나라에 보내 벼슬 살게 하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대사(大使)에 해당한다. 껄끄러운 외교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조율하는 역할이다. 막내아들 흑둔(黑臀)은 왕실로 보내어 천자를 섬기게 하였다. 흑둔은 이름과 달리 가장 진문공을 닮아 피부가 희고 용모가 아랍계 색목인을 닮았다. 후에 그도 군위에 올라 진성공(晉成公)이 된 인물이다. 이러한 조치는 젊은 시절에 로망이었던 제환공의 실패에서 배운 바가 컸다. 후계문제로 낭패를 겪은 제환공의 경우가 타산지석(他山之石, 다른 산의 나쁜 돌도 자신의 산에 옥돌을 가는데 쓰인다는 뜻)이 된 것이다.
진문공이야말로 춘추 300년을 통틀어 가장 극적인 군주였으며 동시에 그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훗날, 제환공과 진문공의 패권에 대해 공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진문공은 수완은 뛰어나나 바르지 못했고, 제환공은 바른 사람이었으나 수완이 뛰어나지 못했다.”
공자는 이들로부터 멀지 않은 200여 년 뒤에 활약했으니,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시점이다. 그가 아는 진문공은 왕실의 분란을 빌미로 감히 천자를 겁박하여 직할 영토까지 갈취한 가증스러운 인물이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따뜻했다. 임금의 관절염에는 고마운 날씨였다.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봄을 마저 기다리지 못하고 어느 아침나절에 진문공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뒷일을 부탁한다!”
이 짧은 말속에는 살아온 세월의 숱한 감회와 사후의 위촉이 모두 함축되어 있었다. 이제 됐어! 이제는 거리낄 게 없어! 마침내 눈을 감았다. 장지문 밖에서는 아침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죽음을 맞는 그의 얼굴에 고통의 흔적은 없었다. 회광반조(廻光返照, 해가 지기 직전에 일시적으로 햇살이 강하게 비추어 하늘이 밝아지는 현상)라고 했던가? 그렇지 않아도 크던 얼굴은 부풀어 오른 듯이 더 거대해지고 오히려 아름답기까지 하였다. 살아생전 보란 듯이 권토중래의 전설을 실현한 입지전적인 이 인물은 죽음과도 싸워 이긴 것일까?
“마치 잠드신 것 같아! 그야말로 영원의 안식.”
“정말이야. 무엇 하나 괴로운 기색도 없으신 모습!”
궁녀들이 자신의 자랑인 양 속삭였다. 너무도 평화롭기에 어디에도 가슴을 쥐어뜯는 슬픔 따위는 없었다. 누구나 소리 내어 울진 않았으나, 눈에서는 거침없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어찌어찌 죽음의 냄새를 맡았는지 대궐의 처마 위에서는 까마귀 떼 7~80마리가 무리 지어 울다가 훌쩍 북쪽으로 날아갔다.
세자 환이 즉위하여 진양공(晉襄公)이 되었다. 진문공이 그토록 염려하고 준비한 탓에 후계 문제로 인한 혼란은 없었다. 진(晉)은 변함없이 패권국가, 방백(方伯)의 자리를 굳게 지켰다.

 

 

한 완 (韓 莞) 작가

 

저자 한완은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74-1982 영천시 교육청에서, 1985-2014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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