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용의 역사탐방-01] 뜨거운 항몽의 유적-용인 처인성

최정용 기자 / 기사승인 : 2019-08-26 15:52:57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승장(僧長) 김윤후의 지휘로 몽골대군과 격전, 적장 살리타이 사살
처인성 전투는 항몽전 가운데 대표적인 지역주민의 자위적 항전

오래된 미래.

 

옛 것을 알아야 지금을 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만행 등으로 대표되는 외세의 한민족 정체성 흔들기가 꼬리를 곧추세우고 있다. 최근 아베를 앞세운 일본제국주의의 만행까지. 우리 민족은 항쟁의 중심에 국민이 있었다. 정부는 개뿔이었고. 오래된 미래’를 주제로 선조들의 항쟁를 살펴볼 참이다. 오래된 미래는 현재의 우리에 대한 가늠자이기 때문이다.     -<시시비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에 있는 처인성은 항몽(抗蒙)의 역사와 함께 승장 김윤후의

무혼(武魂)과 민중항쟁의 승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다. 

 

처인성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에 있다. 항몽(抗蒙)의 역사와 함께 승장 김윤후의 무혼(武魂)과 민중항쟁의 승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이다. 용인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86년부터 문화재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처인대첩의 정신을 승계하고 정비를 추진해 역사문화 콘텐츠를 마련, 후대에 물려주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그러나 최근까지 폐허로 방치돼 안타깝다.  

 

# 처인대첩, 승장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의 항쟁

1232년(고려 고종 19년) 12월. 승장(僧長) 김윤후는 처인성 앞 북쪽 산기슭에 있는 몽골 장수 살리타이를 향해 활을 겨눈다. 잠시 후 ‘김의 화살’이 시위를 떠나 살리타이의 가슴에 꽂힌다. 몽골 10만 대군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역사는 이때를 승장 김윤후와 천민으로 불리며 멸시받던 민초들이 이뤄 낸 위대한 항몽승리(抗蒙勝利)로 기록한다. 모든 구국의 역사는 늘 그 지랄이다.

 

그해 8월 적장 살리타이는 10만 몽골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당시 처인성 지역 부곡민(노예 및 천민)들은 승장(僧長) 김윤후의 지휘로 몽골대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살리타이를 사살, 대몽항쟁 첫 승리를 이끌었다. 김윤후는 살리타이를 사살한 공으로 상장군을 제수받았지만 사양했다. 이런 사내가 많은 나라가 좋은 나라다. 알 수는 없지만 관(官)보다 민(民)에 가까웠던 속내다.

 

당시 몽골의 침입으로 정부는 강화도로 천도, 종묘사직의 유지에 급급했다. 그래서 농민과 천민들이 항몽세력의 주체일수 밖에 없었다. 당시 처인(處仁)은 양민들이 거주하던 군현이 아니라 천민이 살고 있는 부곡이라는 특수지역이었다. 잊지말아야 한다, 천민들의 투쟁을.

1232년(고종19) 8월과 9월에 시작된 몽골의 제2차 침입, 그해 12월에 시작된 처인대첩은 대몽골 항전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는 예고편이다. 여기에 처인전은 '우리 승리하리라'는 예고이기도 하다.

 

이 전투는 항몽전 가운데 대표적인 지역주민의 자위적 항전이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의는 이것이 고려의 정규적인 군사체계와 관리조직의 지휘에 따르지 않은 순수한 지역주민들의 자위적 항전이었다는 점이다. 부곡이라는 특수지역에서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뭉쳐 항쟁했다, 왜. 가진 것 없는 자들의 의롭거나 무모한 항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 처인성

처인성은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있다. 고려시대 수주(水州:지금의 수원)에 속해 있던 처인부곡(處仁部曲)의 토성으로 당시에는 총면적 5천820평(1만9천239㎡)의 직사각형으로 성곽 둘레는 425m다. 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잔존하는 성의 길이는 350m다. 최근 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기와가 출토돼 고려 이전부터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를 비롯해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냥 낡은 언덕이다. 당대가 지나면 관심없는 정부는 누구도 옛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나마 간신히 지난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됐다.

 

# 처인성 관련 고증 작업

처인성에 대한 지표조사는 1998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에서 실시했다. 이를 토대로 1999년 시굴조사를 실시해 처인성 성격 규명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조사 결과 통일신라∼고려시대의 토기와 기와·자기·철기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와 처인성은 통일신라시대 후기부터 많은 사람들의 거주공간으로 활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인성 전투를 이끈 승려 김윤후는 지금의 평택에 속하는 백현원 승려였다는 기록이 있어 처인성이 평택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와 관련해 1998년 처인성의 서북쪽에 있는 십자봉 일대에 대해 몇몇 학자들이 조사를 한 결과 산성으로의 유적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허나, 현존하는 자료를 보면 지금 위치일 가능성이 크다. 용인시와 용인향토문화연구회 등이 자료 발굴 및 연구에 힘써야하는 이유다.

    

▲ 매년 9월 말에 개최되는 ‘용인시민의 날’ 축제는 처인성 승첩의 기상을 용인의 정신으로

승화시켜 나가기 위해 ‘처인승첩 기념 길놀이’로 시작된다.  

 

# 처인성문화제

용인시는 처인대첩을 기념하는 용구문화예술제를 1986년부터 ‘용인시민의 날’ 행사와 함께 했다. 매년 9월 말에 개최되는 ‘용인시민의 날’ 축제는 처인성 승첩의 기상을 용인의 정신으로 승화시켜 나가기 위해 ‘처인승첩 기념 길놀이’로 시작된다.

 

김량장동에서 행정타운까지 당시의 전쟁 모습을 재현하는 처인승첩 길놀이는 부곡민과 몽골의 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거리를 행진하는 등 현장감 있는 볼거리를 제공해 인기가 높다. 용구문화예술제를 처인성문화제로 명칭을 변경하고 처인대첩을 용인의 자랑스러운 역사문화 콘텐츠로 개발하기 위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대제국 몽골과의 전세계 전투에서 첫 승리로 기록될 처인성 전투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또 종전이후 조정이 제시한 공신(功臣) 제의도 표표히 거절하고 초야에 묻힌 김윤후라는 인물도 함께.     

 

[저작권자ⓒ 미디어시시비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

주요기사

+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