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림] 나주 반남의 고분군과 금동관 [자료] 국립나주박물관에서 촬영 |
영산강 유역에는 나주 반남을 중심으로 왕릉급 고분군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이뿐만 아니라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 고대 왕급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이 지역 옹관 고분군의 주인공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어떠한 정치체가 이곳에 성립되어 있었을까? 중국의 『삼국지』에는 마한 진왕이 월지국(月支國)에서 통치했다고 했다. 그런데 마한 월지국이 어디에 위치했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심지어 월지국이 목지국(目支國)의 오기라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월지국과 관련된 『삼국지』의 기사와 『삼국사기』, 『삼국유사』들을 비교 분석한 결과 월지국이 나주 반남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마한)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을 통치한다. 신지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狗邪秦支廉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여기서 문제는 난해해 보이는 신지들의 호칭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의 연구결과 이는 신운(신국) 견지보, 안야 축지, 분신(신분활국) 리아, 부례구야 진지렴으로 해석되었다. 신운신국은 천안으로 비정되고, 신분활국은 경기도 안성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울러 안야(함안 아라가야), 부례구야(김해 금관가야) 등 가야국들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아라가야와 금관가야의 신지들이 진왕에게 복속하고 있을까 하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삼국지』는 서진 시기인 280~290년에 편찬되었으므로 위 기사는 3세기 중반의 마한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그 이전에 함안 아라가야와 김해 금관가야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가야 기록을 살펴본 결과 3세기 초에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서 대규모의 포상팔국전쟁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도 209년과 212년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이 발생하였다.
『삼국사기』물계자전에 따르면, 209년에는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함께 아라국(阿羅國)을 치기로 하자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고 했으며, 212년 전쟁에 대해서는 “3년이 지나 골포(骨浦),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의 세 나라 사람들이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갈화성을] 구하고, 세 나라의 군사를 대패시켰다.”고 했다.
209년 전쟁은 그 대상이 아라국이었다. 포상팔국에게 공격당한 아라가야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신라에서 여덟 나라의 장군을 죽이고 포로로 잡혔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전쟁에 포상팔국과 아라가야, 신라 등 최소 10개국이 참전한 것으로 보아 209년 전쟁은 한반도 남해안을 뒤흔든 대규모 전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음으로, 212년 전쟁에 대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가야가 신라의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했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물계자전에는 정작 전쟁이 발생한 곳이 가야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북인 갈화성(울주)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이는 구원을 요청한 가야가 이미 패망하고 신라의 국운까지 위협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선이 김해의 금관가야에서 울주 갈화성까지 북상하였기 때문이다. 212년 기사를 끝으로 가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는 가야가 포상팔국의 공격에 의해 패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포상팔국전쟁을 주도한 세력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를 자세히 파악하려면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본서기』의 기록을 대조해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삼국유사』의 제8 피은 물계자전에는 “무릇 보라(保羅)[발라(發羅)로 의심되는데, 지금의 나주(羅州)다.]·갈화의 전쟁은 참으로 이 나라의 환란으로 임금이 위태로웠으나, 나는 일찍이 나를 잊고 목숨을 다하는 용기가 없었으니, 이는 충정이 깊지 못함이라...”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물계자의 전언에 전쟁을 보라·갈화 전쟁으로 칭하는 것으로 보아 포상팔국전쟁은 보라국이 주도한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삼국유사』의 일연은 보라국을 나주의 발라국으로 비정했다. 그래서 250~260년경 『삼국지』를 기록한 사관들이 마한을 방문했을 때 이들 나라가 월지국 진왕에 신속된 신지들로 소개된 것이다.
포상팔국전쟁이 발생한 시점과 아주 가까운 시기의 『일본서기』 기록에도 가라 7국 정벌전쟁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신공) 49년 봄 3월에 황전별, 녹아별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 사사노궤[이 두사람의 성(姓)은 알 수 없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게 명령하여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비자발, 남가라, 록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고 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은 실제 227년인데 3세기 한반도에서 가야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가라 7국 정벌전쟁이 포상팔국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포상팔국전쟁과 『일본서기』 가라 7국 정벌전쟁은 같은 전쟁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기록한 것으로 분석된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가야 정벌전쟁을 주도한 사람은 나주 회진에 포진한 마한의 목라근자 장군이다. 전쟁주도 세력(『삼국사기』와 『삼국유사』)과 전쟁을 수행한 장군(『일본서기』)의 출신 지역이 모두 나주로 나타나 마한 월지국은 나주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할 수 있다.
-시리즈 20편에 계속됩니다.
![]() |
▲ 박동(朴東) 박사 |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羅)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저작권자ⓒ 미디어시시비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