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시론-유종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에 대하여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0-09-08 16:5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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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보유국과 비보유국의 평화협정은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한 우리 동거다. 전적으로 육식동물의 선의에 의존하는 관계가 된다

대한민국 통일부 장관의 평화론은 그 장소 그 직위에서 듣기 좋은 수사일 따름이지 결코 현실을 저버린 이상론이 아닐 것이다

▲ [특별시론-유종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에 대하여

 

    

유종필

 

통일부 장관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평화를 말했다. 통일부 장관이 평화 관련 행사에서 이상론적 덕담을 말한 것이라 치면 간단하다. 역대 모든 대통령이 말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동일 맥락인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다만 북한 비핵화의 목표인 CVID를 원용하여 비핵화자리에 평화를 넣었다 해서 혹 비핵화 없는 평화, 즉 북한의 목표와 같은 것을 말한 것 아니냐는 일부의 의혹을 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관이 그런 의도로 말했을 리 없을 것이다. 비판자들 역시 평화를 위한 뜻이지 전쟁하자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사실 항구적 평화되돌릴 수 없는 평화라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수사일 따름이다. 인류역사상 대소 평화협정은 8천여 회 있었고, 평균 유효기간은 2년 정도라고 한다. 평화협정의 불완전성을 말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뮌헨 평화협정(1938)1, 베트남전쟁에 관한 파리 평화협정(1973)2년간 유효했다.  

 

체결 당시 제기되었던 위장평화비판이 입증되는 데엔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뮌헨에서 귀환한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런던의 공항에서 히틀러의 서명이 들어간 협정서를 흔들면서 여기에 평화가 들어있습니다라고 개선장군처럼 외쳤다. 다음 날 아침 다우닝가 10번지 관저 밖이 소란스러워 잠에서 깨어난 그는 소음의 정체가 자신에 대한 환호성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협정서를 꺼내 흔들었다. 그는 광대놀음을 했지만,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평화협정서는 휴짓조각에 불과함을 입증시키는 역사적 사명을 잘 수행한 셈이다.

 

파리 평화협정의 주역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은 그 공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공동 수상자인 북베트남의 레둑토는 수상을 거부했다. 곧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품고 있는 그로선 당연한 일 아니었겠나. 그 뒤 키신저는 큰 망신을 당하고 노벨상을 반납했다. 협정 성공 직후 키신저가 한국에 왔을 때의 일화.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제 베트남에 평화가 왔습니다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베트남은 곧 공산화되겠네요라고 시니컬하게 응수했고, 키신저는 염려 마세요라고 했다고 한다.(김종필 회고록)

 

도요데미 히데요시가 건설한 오사카성은 해자 너비 80미터, 이중 해자의 난공불락의 성이다. 지금 한눈에 봐도 압도적 위용이다. 아들 히데요리가 다스릴 때 막강 전력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공략에 번번이 실패했다. 도쿠가와는 전략을 평화공세로 바꿔 평화협정을 맺는 데 성공했다. 협정 후 그는 히데요리에게 이제 평화가 왔으니 해자 같은 것은 필요 없는 것 아니냐. 백성들에게 평화의 징표를 보여주기 위해 해자를 메꾸자고 제안하고 자기 손으로 메꿔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성을 함락시키고 히데요리를 죽여버렸다. 백성들이 도쿠가와를 신의 없는 인간으로 비난하자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니, 적의 말을 그대로 믿는 바보가 어디 있느냐. 그런 자는 죽어도 싸다.” 안보의 비정하고 엄혹한 현실을 웅변해준다.

 

핵보유국과 비보유국의 평화협정은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한 우리 동거다. 전적으로 육식동물의 선의에 의존하는 관계가 된다. 늑대가 마음 고쳐먹고 양들과 사이좋게 사는 것은 동화에선 가능할지 몰라도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사자와 얼룩말의 포옹 그림이 많이 유포된 적이 있다. 참 보기 좋은 그림이다. 필자도 얼른 보고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천국의 모습일 따름이다. 백성의 생명과 재산은 상대의 선의에 의해 지켜진 적이 없다. 이상론으로 지켜진 역사가 없다. 현실에 바탕한 이상론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통일부 장관의 평화론은 그 장소 그 직위에서 듣기 좋은 수사일 따름이지 결코 현실을 저버린 이상론이 아닐 것이다.

<전 한겨레신문 기자/한국기자협회 편집국장/민주당 대변인/5~6대 관악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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