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윤석열 퇴진’ 구호와 광장정치의 야만성

김영호 기자 / 기사승인 : 2022-12-13 14:2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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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영백 편집위원
아테네인들은 사고, 숙고, 토론을 높이 평가했다. 스파르타인들은 단순명료한 것을 선호해서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 것을 싫어하기로 유명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자 페리클레스는 민주주의가 논쟁과 토론을 좋아한다고 했다. 모든 시민에게 똑같이 확대된 표현의 자유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대명사였고, 그것의 밑바탕에는 이성과 지성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는 인간의 능력과 욕망이 합리적 토론과 지성이 안내하는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장 높은 수준에서 충족될 수 있다고 믿었다.

1987년 체제 이후 이미 여러 차례의 정권교체를 경험한 국민들은 SNS의 발달과 더불어 한껏 정치 영역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정체를 신뢰하는 대한민국에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대의정치를 주된 수단으로 삼은 우리에게 오늘날의 광장정치와 이곳에서의 정치 과잉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적신호를 보내고 있다. 주말마다 광화문과 태평로 여기저기에서 임기 겨우 6개월여를 보내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을 퇴진하라는 피켓과 더불어 촛불 행진이 진행되고 있다.

정치과정에서의 민주주의의 꽃, 선거

정치학에서는 ‘정치과정론’이라는 단원이 있다. 정치과정이란, 첫째,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요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이익표출의 단계, 둘째, 표출된 이익을 모아 요약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이익집약의 단계, 정당의 역할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이를 바탕으로 관련 법률을 제정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단계, 국회가 이 지점에 해당한다. 넷째,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에 따라 정책을 실제로 집행하는 단계, 정부의 역할이다. 마지막으로 정책 집행에 대한 국민의 평가 및 의견이 정치과정에 다시 반영되는 과정, 선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정치과정을 통해 국민의 의견과 요구가 정책에 반영되며, 나아가 정책 결정(국회)과 집행 과정(정부)이 타당한지 국민이 위임한 정치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가능케 된다. 무엇보다도 정치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이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바로 선거이다. 가히 민주주의의 꽃이다.

불과 8개월 전에 선거를 통해 뽑은 국민의 대표를 취임 6개월이 지나가는 이 시점에 그 직을 내려놓으라고 비록 일부지만 아우성이다. 과연 온당한 정치 행위일까? 그들은 그것의 정치적 의미를 알고서나 그러는 것일까? 첫째, ‘윤석열 퇴진’이라는 구호는 반헌법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 67조에 의거 해서 대통령이 되었고, 헌법 70조에서 그 임기와 역할을 보장받았다. 헌법 그 어디에도 ‘퇴진’이라는 조항은 없으며 그래야 할 합당한 이유나 사정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를 주장하는 자들은 대한민국의 헌법에 반하고 이 땅에서 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무정부주의자에 다름 아니다.

둘째, 선거의 의미, 특히 대통령 선거의 의미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반민주주의적이다. 선거는, 특히 대선은 정치와 민주주의를 새롭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회다. 선거는 단순히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표자의 통치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물론 국민을 통합하는 기능도 한다. 국민통합기능이란 복수의 후보, 정책대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국민의 의사를 통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거를 통해 선택된 후보나 정책은 국민 전체의 의사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그것의 표 차이가 아무리 근소할지라도 말이다. 선거의 진정한 승리는 자신이 뽑은 후보의 승리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제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성숙한 주인과 시민으로 입증할 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윤석열 퇴진’은 정치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선거의 의미를 무색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분히 대선 결과에 대한 불복이다. 명백히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위이자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처사다.

셋째, 대통령 퇴진을 운운하며 광장으로 나서는 것은 다시금 ‘야만’으로 되돌아가자는 반문명적 행태이다. 지난 5년 문재인 정권이 가져다준 가장 큰 병폐는 양극화다. 부동산 정책 실패로 인한 경제적 양극화는 말할 것도 없고 ‘내편 네편’으로 갈라진 정치적 양극화 또한 대단히 심각하다. 조국 사태를 겪으면서 확연히 갈라진 정치적 양극화는 이제 끝모를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서로의 입장과 위치만 바뀌었을 뿐 고스란히 그 폐단은 이어져 오고 있다. 광장과 거리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믿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확증 편향하면서, 내편 네편으로 머리 숫자 세며, 패싸움 같은 짓으로 언제까지 증오를 키워갈 것인가. 야만이 들어서는 지점이다.

 

▲매주 열리는 윤석열 대통령 퇴진집회 / SNS 캡쳐

 


광장정치의 야만에서 벗어나 대의정치의 문명으로 나아가자

광장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국정을 논의하고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광장은 사람들이 사적·공적 일에 관해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는 공공장소로써 정치, 경제, 사법,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다. 자유로운 토론은 평화적이었고 폭력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아테네의 광장정치는 극단적인 주장을 배제하고 공공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지금 우리의 광장은 어떤가.

감정의 유대성으로 뭉친 사람들이 자기 쪽의 절대적 선과 정의에 확신하여 상대에 대한 철저한 배타성과 악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의견이 같은 이들이 뭉쳐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만 난무하다 보니 보편적인 의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토론을 통한 타협의 모색이 아닌 세 과시를 통한 상대방 제압이 목적이다. 이는 오로지 증오와 공격만이 있는 ‘광장투쟁’에 불과하다. 합리적인 주장이 먹힐 리 없고 정치는 완전히 실종된다. 정치 실종은 결국 극한 수준의 광장 갈등으로 전이된다. 진보단체인 촛불승리전환행동(촛불행동)은 주말마다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태원 참사 이후 “퇴진이 추모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이태원 희생자들의 추모식을 정쟁화했다. 하지만 논리적 근거가 전혀 없다. 참사와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과는 어떠한 관련성도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추모로 이어지는 것은 더더욱 괴변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공동의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모여 대화와 토론으로 의사를 결정하기는 어렵다. 인구 증가로 모여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 범위 또한 넓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도입된 것이 대의 민주주의이다.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의 의견을 대변하는 공동의 문제를 숙고해 결정하고 시행하게 될 사람들을 선출해 이들에게 일을 맡긴다. 아무리 정치권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치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도 광장정치가 대의정치를 대체할 수는 없다. 통치제도로서 갖춰야 할 대표성과 책임성을 담보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야만에서 문명으로의 발전의 역사다. 물질의 풍족함으로 인한 신체적 문명과 문화와 사상을 통한 정신적 문명으로의 진입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상태에서 국가와 정치를 만들어 안전과 문명의 발전을 담보했다. 문명 내부에서 이성적인 해결책이 가로막히면 절망이 지배하고 절망은 문명을 포기하고 야만을 선택하게 만든다.

윤석열 대통령의 실패는 대한민국의 실패다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과 대통령으로 인정 못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는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마땅히 있어야 하는 정치 행위다. 그래야 권력이 부패하지 않고 정치가 건강해진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정치 체제 자체를 흔드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싫다고 그에게 헌법이 부여한 권력 자체를 빼앗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건 대한민국 정치 체제는 물론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정상적인 나라에서 헌법으로 임기가 보장된 대통령을 중간에 끌어내리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지난 대선 때 그를 지지하고도 윤 대통령에 대해 실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잠시 뒤집어 생각해보면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통령 자리는 다른 사람들은 수십 년 인고의 세월을 거쳐서 오르는 곳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달랐다.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열망으로, 중도, 보수 유권자 중에서는 윤석열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이재명이나 민주당의 집권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를 지지했다. 별다른 정치 경험이 없던 그를 결국 대통령으로 뽑았던 것이다. 이에 많은 국민들은 그에게 여러 가지의 것들을 기대하며 동시에 실망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보수우파는 물론 중도 진영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기대를 담아내야 하는 그릇으로서, 원치 않는(?) 십자가를 지고 있다.

보수우파나 정권교체를 열망했던 중도 진영까지 윤 대통령을 도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 경험이 적고 갑작스럽게 불려 나온 그이기에 더더욱 참고 기다려줘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진영을 떠나 국민 모두가 그를 도와야 한다. 그의 실패는 한 정권의 실패를 넘어 대한민국의 실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거와 같은 카리스마 짙은 지도자는 나오기 어렵다. 지도자는 그 시대와 문화의 산물인바 이제 정치 환경 자체가 달라졌다. 앞으로 어떤 지도자, 어떤 대통령이라도 우리 국민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며, 대통령의 직 역시 단순히 기능적이고 하나의 직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그냥 오지 않는다. 원래 민주주의는 인간의 합리성을 전제로 한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 중우정치로 갈 수 있음을 이미 고대 철학자 플라톤이 예견하지 않았던가.

이제 더는 야만에 머물지 말자. 문명 세계의 유권자는 투표로 말하고,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극한의 광장에서 벗어나 제도와 시스템의 대의정치로 나아가자.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존중하고 그것의 성장에 국민적 역량을 쏟아붓자. 패거리와 패싸움의 피곤한 야만에서 토론과 사고의 즐거운 문명으로 가자.

 

[출처 : 모닝포커스(http://www.morningfocu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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