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끊이지 않는 화두
‘혁신’이란 민심의 선택을 소구하는 가장 유혹적인 미끼
민주당 김은경 혁신위, 역대급 노인 폄훼 발언으로 처참히 자폭
‘인요한 혁신위’도 잠시의 관심 이상의 성공스토리 못 만들어
혁신(革新)은 ‘가죽을 다듬고 두드려 새롭게 만든다’는 뜻이다. 명나라 문인 송존표(宋存標:1601~1666)의 ‘무검부(舞劍賦)’ 중 ‘종경혁신(從庚革辛)’ 표현이 최초의 용례로 알려져 있다. 뿌리를 더 찾다가 보면 후한말의 정치가 사손서(士孫瑞 ?~195)의 ‘검명(劍銘)’에 ‘종혁경신(從革庚辛)’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송존표는 거기에서 일부 글자의 순서만 살짝 바꾸었다. 10간(干)에서 쇠는 경(庚)과 신(辛)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혁신’이라는 말의 진짜 연원을 말하자면 무려 3000년 전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가르쳤다는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규범 ‘홍범구주’(洪範九疇)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자는 오행 강론에서 쇠의 부분에 이르러 ‘금왈종혁(金曰從革)’이라는 말을 쓴다. ‘쇠는 달구면 대장장이가 두드리는 대로 그에 좇아(從 순종) 모양이 바뀌는(革 변혁) 성질이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혁신(革辛->革新)은 본래 쇠가 갖는 변혁의 성질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작금에 명멸(明滅)한 여야 정당들의 혁신위, 괴이하기 짝이 없어
‘정치개혁’은 정권이 바뀌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화두다. ‘개혁’ 구호로 유권자들을 홀려 일시 표심을 얻은 정치세력도 시간이 지나면 오염되거나 식상해져서 민심으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이다. 세상만사란 흐르다 보면 오염되기 마련인 물과 같아서 예외 없이 결국 탁하고 냄새나는 구정물이 되고 만다. ‘새 물’을 선망하는 대중의 기대는 늘 강렬할 수밖에 없다. ‘혁신’이란 번번이 민심의 선택을 소구하는 가장 유혹적인 미끼가 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정당들은 곤경에 처하거나 길이 막힐 때마다 ‘혁신위원회(혁신위)’라는 이름의 특별한 돌파 무기를 등장시킨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응급 처방인 셈이다. 혁신위는 대략 국민 앞에서 ‘사죄 쇼’를 벌이고, 썩은 살을 잘라내는 시늉을 하고, 나아갈 방향을 새롭게 제시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혁신위의 역할과 능력에 따라서 민심을 모으는 데 성공하는 케이스도 없지 않다. 그런데, 작금에 일어나는 여야 정당들의 혁신위는 괴이하기 짝이 없다.
여당 혁신위 조기종식, ‘보궐선거 참패’ 금세 까먹었다는 증거
국민의힘 혁신위원회가 핵심 혁신안을 놓고 당 지도부와 갈등을 보인 끝에 출범 40여 일 만에 ‘조기종식’을 선언했다. 야심 찬 혁신안인 ‘지도부·중진·친윤 의원의 불출마 또는 험지 출마’ 권유에 대해 당은 부정적인 반응 일색이었다. 지도부가 뾰족한 감정마저 드러내면서 인요한 혁신위원회가 스스로 존속 의지를 접어버린 양상이다. ‘인요한 혁신위’는 결국 등장 이후 잠시 일궜던 뜨거운 관심을 넘어서는 성공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인요한 혁신위가 제안한 2~5호 혁신안에 대해 지도부는 소극적 답변을 거듭하면서 시간을 끌어왔다. 일부 지도부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의 행간에는 혁신안을 ‘월권’으로 보는 날카로운 감정이 빼곡했다. 인요한 위원장은 김기현 대표가 주겠다던 ‘전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며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용두사미(龍頭蛇尾)의 뒷맛을 남긴 인요한 혁신위 잔상에는 국민의힘 핵심들이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의 참패 충격을 금세 다 까먹었다는 증거가 분명하다.
민주당 혁신위, '불체포 특권 포기' 요구했지만 지도부는 움쩍도 안 해
지난여름 한차례 해괴한 촌극처럼 스쳐 지나간 더불어민주당의 혁신위는 더 야릇했다. 페이스북에 올린 “(천안함 피격 사건은) 미국 패권 세력이 조작한 자폭”이라는 망발로 인해 거꾸러진 이래경 혁신위에 이어 등장한 게 김은경 혁신위였다. “국민의 도덕적 눈높이에 맞는 더불어민주당”을 포부로 밝히고 출발한 김은경 혁신위 역시 위원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돈 봉투 의혹의 검찰 조작 가능성’ 한 줄의 글로 인해 처참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김은경 혁신위는 2023년 6월 22일 2차 회의에서 ‘국회의원 전원의 불체포특권을 포기하는 취지의 서약서 제출’과 ‘추후 국회의원 체포동의안 가결을 당론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든 이재명 대표를 지켜야 하는 민주당 지도부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7월 김은경 위원장이 노인들을 겨냥해 내놓은 “왜 미래가 짧은 분들이 똑같이 1대 1로 표결하느냐”는 역대급 폄훼 발언으로 자폭하면서 혁신위는 부랴사랴 문을 닫아야만 했다
무쇠와 가죽 새롭게 만드는 수고로운 ‘혁신’, 더는 모독하지 말라
여야 정당의 ‘혁신위’ 명멸(明滅) 행태를 보며 국민은 정치에 대한 환멸을 점점 더 키우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혁신위원회’를 성난 민심을 달래고, 화장술로 민낯을 잠시 감추기 위해 임시 고용한 ‘떴다방’ 삐에로 정도로 취급하는 게 분명해졌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대 정당들은 혁신위의 혁신안들이 여전히 ‘실천과제’로 살아있다고 욱대긴다. 그러나 양당 지도부가 민심을 담은 혁신안을 수용하리라는 기대는 아직 가뭇하다.
정당들이 위태로울 적마다 내놓는 ‘혁신위원회’는 국민을 잠시 홀리는 관행적 최면(催眠) 수단으로 변질됐다. 지금처럼 혁신위마저 싸구려 ‘떴다방’ 삐에로 취급하는 정당들에 희망을 걸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치혁신’의 길은 몰라서 못 가는 길이 아니다. 다만 사리사욕에 찌든 정치꾼들에 첩첩 가로막혀 있을 뿐이다. 깜냥도 안 되는 정치꾼들이 가당치도 않게 ‘정치혁신’을 입줄에 올리는 망발일랑은 이젠 그만 보았으면 좋겠다. ‘무쇠를 달궈 두드려 바꾸고, 가죽을 다듬고 두드려 새롭게 만드는 한없이 수고로운 일’을 더는 얄팍한 꾐수로 동원해 허투루 모독하지 말라.
안재휘(安在輝)
-언론인/칼럼니스트
-제34대 한국기자협회 회장
-(現)인터넷신문 미디어 시시비비 대표
[저작권자ⓒ 미디어시시비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