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데의 풍차’ 앞에서 삶을 고뇌해 보길
“이윽고 성당의 큰 시계가 울리며 12시를 알렸다. 40년 동안 한결같이 프랑스어를 가르쳐 온 아멜
선생님은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러분, 나는... 나는... 감정이 복받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선생님은 칠판에 크게 ‘프랑스 만세’라고 쓰고 아무 말 없이 수업이 끝났음을 손짓으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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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 문화칼럼니스트·정치학박사 |
뜨거운 눈물을 용솟음치게 하는 장면이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독일에게 나라를 빼앗긴 프랑스인들. 끝내 모국어마저 금지당하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이 참담함을 도데는 소설로 묘사해 심금을 울렸다. 이 단편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같은 역사를 공유한 우리도 학창시절 배웠기 때문이다.
자연주의 소설가 도데, 그는 1840년 프랑스의 님에서 태어났다. 남쪽 끝자락 지중해의 관문인 이곳에서 그의 부모님은 길쌈을 짓고 비단 도매상을 했다. 그런 부모 밑에서 도데는 천진난만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근대화로 아버지 회사가 문을 닫자 리옹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끝내 아버지는 파산했고 도데는 중학교 사환으로 취직했다. 그런 그를 형 에르네스트가 파리로 불렀다.
상경한 도데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시집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발표했다. 이를 높이 평가한 나폴레옹 3세의 이복동생 모르니 공작은 그를 비서로 채용했다. 하지만 도데가 스물다섯 살 때 공작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도데는 피콜로(Piccolo)라는 가명으로 신문에 계속 글을 연재했고 르 피가로 기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열아홉 살 때 도데는 프레데릭 미스트랄을 파리에서 만났다. 당대 최고의 작가였던 미스트랄은 프로방스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를 방언으로 노래한 서사시 ‘미레이오’를 발표했다. 이를 보고 도데는 프랑스 남녘에는 특유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프로방스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그는 미스트랄을 만나러 옥시탄에 자주 갔다. 어느 날 사촌 루이와 그의 부인 옥타비아가 그를 초대했다. 훗날 그의 절친이 된 티몰레옹 앙브로이 형제가 그를 친근하게 맞이해 줬다. 이들은 퐁비에이유로 함께 바람을 쏘이러 갔다. 도데는 이들의 따뜻한 환대와 퐁비에이유 언덕의 고요에 그만 매료됐다.
퐁비에이유, 백사장과 파란 바다가 펼쳐진 알프 코트다쥐르에 있는 아름다운 명소다. 이 마을은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무대인 아를과 길쌈의 마을 파라두 사이에 있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상업이 성행해 흥겨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또한 역사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언덕·풍차·몽토방성의 정원·오래된 성당과 소성당·숲과 성·정돈된 촌락·박물관이 있고 특히 공동빨래터가 잘 보존돼 있었다. 중세의 오래된 성에는 여전히 큰 탑이 우뚝 서 있었다. 19세기 말 퐁비에이유에는 농부들과 석공들이 유숙했다. 주민들은 카페에 모여들었고, 축제 때는 빨래터에 시장이 열렸다.
퐁비에이유 언덕에는 쌩 삐에르 풍차가 있었다. 그곳에 올라 도데는 이 마을의 전경을 응시하곤 했다. 이 풍차는 훗날 ‘도데의 풍차’로 재탄생했다. 이 마을에서 도데는 몽토방 성을 발견했다. 여기서 파리의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를 벗어던지고 재충전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와 일화를 들었다. 이는 훗날 도데 소설의 모태로 작용했다.
역사가 물씬 묻어 있는 몽토방, 지금도 퐁비에이유의 명물로 많은 관광객의 총애를 받는다. 몽토방은 청소년기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 도데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평화의 항구였다. 도데는 이곳의 꿈과 현실을 교차해 소설에 묘사했다.
30년 동안 도데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퐁비에이유에 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건 1891년. 그의 절친 티몰레옹을 만나기 위해서 프로방스를 방문했다. 이때 그는 풍차에 올라 프로방스의 풍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앞에서부터 측면 아래까지 이어지는 반짝이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 수평선에는 알필의 가느다란 능선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고요하다. 멀리서 어렴풋이 피리소리가 들리고, 라벤더 속에 물새 한 마리, 길 위의 노새의 왕방울 소리만 들린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이 프로방스의 풍경은 빛이 있어 바야흐로 생명을 얻는다.”

이로부터 6년 뒤 도데는 죽었고 파리 20구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알퐁스 도데 사모회’는 1935년 퐁비에이유 ‘도데의 풍차’를 뮤지엄으로 만들었다. 프로방스의 작가를 추모하고 옛사람들의 직업을 길이길이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도데는 성장기 친하게 지낸 자연과 지중해를 잊지 못하고 그 감성을 녹여낸 특유의 글들을 썼다. 그의 글들은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녹아들어 있어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과 소리 없는 교훈을 준다. 그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보았던 시골 포도주·여흥 등을 추억으로 고이 간직하다 소설에 재등장시켰다. 이러한 그의 문화유산은 프로방스 아이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정신을 살찌운다.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회오리바람 앞에 서 있다. 기계화되고 메마른 인간의 정서를 녹여줄 촉촉한 단비가 필요하다. 도데의 삶과 소설들이 유독 가슴에 와 닿는 이유다. ‘도데의 풍차’가 있는 퐁비에이유를 찾아간다면 이런 단비를 만날 것이다.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뇌해 보는 순간을 갖는다면 우리의 삶은 좀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출처: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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