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네'는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을 하나로 엮어 상상하지도 못한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는 솜씨'다.
…인문 운동가로서, 나는 사람들에게 흔히 말하는 쓸데없는 일을 궁금하게 만들어 주려고 노력한다.
…기술과 예술은 실패라는 경험들이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결합할 때, 슬그머니 나오는 감동이다.
…예술가는 시간 있다고 TV만 보거나 잠을 자지 않고, '저 너머'를 꿈꾼다. 생존만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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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테크네'는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을 하나로 엮어 상상하지도 못한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는 솜씨'다.
…예술가는 그 순간에 몰입하여 이질적인 것들에서 최고를 선택하여 표현하는 사람이다. 몰입하지 않는 기술이나 예술은 없다.
…인문 운동가로서, 나는 사람들에게 흔히 말하는 쓸데없는 일을 궁금하게 만들어 주려고 노력한다.
…기술과 예술은 실패라는 경험들이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결합할 때, 슬그머니 나오는 감동이다.
…예술가는 시간 있다고 TV만 보거나 잠을 자지 않고, '저 너머'를 꿈꾼다. 생존만을 위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종류의 거센 비바람 속에 살고 있다. 그 비바람은 경제적인 불평등, 생태계 파괴, 육체적, 정신적 폭력 그리고 여러 가지 전쟁들로 나타나 우리 주변을 휘돈다. 특히 지구 온난화는 봄을 이상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두려움과 분노, 탐욕과 교활함 그리고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나 우리 내면을 휘돈다. 이런 상황에서 광기에 사로잡혀 인간성마저 잃어버린 채 방황하다가 자신의 영혼과 분리된 이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자신의 영혼과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 영혼의 질서를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 여유를 갖고, 잠시 멈추어 예술을 누려야 한다.
예술은 라틴어로 ars라 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 필멸성이 동물 상태의 인간을, 영원을 희구하는 신적인 인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러한 여정에서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377)는 부모로부터 의술을 배웠고, 그것을 처음으로 체계화하여, 의사가 되려는 학도들을 위한 '교본'을 만들었다. 전쟁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을 치료하면서 시간의 시급함과 응급처치의 중요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의 의학 교본에 등장하는 '격언집'(Aphorismi)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인생은 짧고 기술은 길다. 위기는 쏜 화살처럼 달아나고 경험은 위험하고 결정은 어렵다. 의사는 '자신에게 옳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환자, 간호원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인생이 짧으니, 자신에게 "옳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다른 이들과 협력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짧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며 심판을 하는 시간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강물이 흘러가듯 항상 저만치 달아나버린다. 우주가 빅뱅으로 탄생한 137억년 전이나 이 글을 쓰기 시작한 1시간 전이나,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순간이다. 인생은 허약하고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다. 그런 삶을 연장하는 열쇠가 '기술'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테크네'가 나온다. 여기서 '기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테크놀로지'(technology)가 나온 것이 아닐까?
'테크네'는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을 하나로 엮어 상상하지도 못한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는 솜씨'다. 이건 안목에서 나온다. 배철현 교수는 지구와 동식물을 살리는 물은 수소 2개와 산소 하나의 절묘한 결합이며 정반대 것들, 즉 암수의 결합으로 창조된 모든 생물이 그 예들이라 말했다.
로마로 와서, 호라티우스는 히포크라테스의 문장을 라틴어로 'vita brevis ars longa(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로 번역하였다. 그는 그리스어 '테크네'를 라틴어 '아르스'로 번역하였다. 예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아트(art)'의 어원이다.
여기서 예술은 우리가 흔히 아는 예술을 포함한 모든 기술을 의미한다. 예술은 어떤 분야든지 최선의 경지를 지칭하는 용어다. 예술가는 그 순간에 몰입하여 이질적인 것들에서 최고를 선택하여 표현하는 사람이다. 몰입하지 않는 기술이나 예술은 없다. 예술이나 기술은 몰입하여 이질적인 들에서 최고를 선택하는 수고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21세기 문명의 기반인 최첨단 기술은 고독을 통한 그의 심오한 통찰이 만들어낸 예술"(배철현)이라 했다.
그러니까 ‘예술’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 ‘아르스(ars, 그리스어 테크네, 기술)’의 의미가 ‘우주의 질서에 알맞게 만물(萬物)을 정렬시키다'가 되는 것이다. 이 정렬 시키는 일이 '배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을 지배하며, 몇 가지 삶의 규칙을 가지고 '지금-여기'의 삶을 정돈하는 사람은 모두 예술가이다. 그냥 충동적으로, 감각적으로 살면서 무질서한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가는 시간 있다고 TV만 보거나 잠을 자지 않는다. '저 너머'를 꿈꾼다. 생존만을 위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인문 운동가도 예술가이다. 인문 운동가로서, 나는 사람들에게 흔히 말하는 쓸데없는 일을 궁금하게 만들어 주려고 노력한다. 먹고 사는 일 이외에의 것들에 관심을 갖게 하고 싶다. '테크네'와 ‘아르스’는 하찮아서 잘 보이지 않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솜씨 있게 엮어내는 기술이다. 마치 그 솜씨가 어머니가 담근 김장김치 맛처럼, '테크네'와 '아르스'는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경험이 만들어 준 최적화된 간결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과 예술은 실패라는 경험들이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결합할 때, 슬그머니 나오는 감동이다. 나는 주변의 기술자들에게서는 그 감동을 보았다. 그러나 주변의 예술가들에 게서는 그 감동을 보지 못하고 있다. 물론 내 안목이 문제일 것이다.
다음은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이다.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삶이 예술을 모방한다." 이 문장을 찬찬히 읽어 보니, 예술을 모방하는 자가 삶을 더 풍요롭게 하며 더 잘 살아남는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 운동가는 예술을 모방하는 아티스트(예술가 artist)이다. 예술가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미래는 '지금-여기'에서 내가 원하는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부단히 수련할 때 만들어지는 예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는 '지금 이 순간-저기가 아닌 여기'에 몰입해 최선을 다할 때 자연스레 다가오는 신의 선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때 내 일상(日常)은, 신의 선물인 예술로 승화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술’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 ‘아르스(ars)’의 의미가 ‘우주의 질서에 알맞게 만물(萬物)을 정렬시키다'인 것처럼, 매일의 일상을 지배하며, 몇 가지 삶의 규칙을 가지고 '지금-여기'의 삶을 정돈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예술가이다. 그는 시간 있다고 TV만 보거나 잠을 자지 않고, '저 너머'를 꿈꾼다. 생존만을 위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인문학자와 인문 운동가는 다르다. 인문학자가 과학자라면, 인문 운동가는 공학자이고 기술자이다. 인문학이 이론이라면, 인문 정신은 일상에서 구현되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면 인문학자이고, 사랑이라는 말이 생활에서 구현되어 친절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인문 운동가이다.
알게 하는 것과 사랑하게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가령 과학지식을 가르쳐 알게 하는 것은 과학교육이지만, 과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는 것은 문화가 있어야 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도 인문 지식을 배우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인문 정신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는 문화가 중요하다. 이때 인문학의 역할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각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고통받는 타인을 향한 위안과 공감을 불러내, 보이지 않는 연대를 이루는 일이다. 나 자신의 존재만을 위해, 나만 잘 살려고, 내 존재만 풍성하려고, 공부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아침 <인문 일지>의 길이 다른 곳으로 샜다. 샌 김에 시를 한 편 읽고 넘어간다. 천양희 시인을 만난다.
거꾸로 읽는 법/천양희
하루가 길게 저물 때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 때
무슨 말이든
거꾸로 읽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정치를 치정으로 정부를 부정으로 사설을 설사로
신문을 문신으로 작가를 가작으로 시집을 집시로
거꾸로 읽다 보면
하루를 물구나무 섰다는 생각이 든다
내 속에 나도 모를 비명이 있는 거다
어제는 어제를 견디느라
잊고 있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직성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넌 아직도
바로 보지 못하는 바보냐, 한다
거꾸로 읽을 때마다
나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나도 문득
어느 시인처럼
자유롭게 궤도를 이탈하고 싶었다
세상의 풍파에 영혼의 질서를 흩트리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핵심인 영혼이 우리의 삶을 이끌 힘을 길러야 한다. 영혼의 질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가 영혼을 깨달으면 폭풍우 속에서도 희망과 길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면 '숨겨진 온전성'을 회복할 수 있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의 영적인 도구를 가지고 태어났다. 히브리어는 인간을 말하는 아담 말고, '네페쉬(nepesh)'라는 말로 '특별한' 인간을 표시하였다. 신이 진흙으로 만든 인간의 코에 숨을 불어 넣으니, 인간(아담)이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네페쉬)'가 되었다고 히브리 시인은 노래한다. 인간은 매 순간이 생동하는 영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인 아담이 아니라, 매 순간 살아 움직이는 '네페쉬'이다. '네페쉬'는 우리가 가진 언어의 구분을 초월하는 단어로 "존재, 영혼, 생명'이란 의미이다.
인도 경전 『우파니사드』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기쁨은 이 세상의 모든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쾌락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배철현 교수의 <매일 묵상>에서 얻은 생각이다. "당신은 당신의 깊은, 그리고 당신을 인도하는 열망입니다. 당신의 열망이 있는 곳에, 당신의 의지가 있습니다. 당신의 의지가 있는 곳에 당신의 행위가 있습니다. 당신의 행위가 있는 곳에, 당신의 운명이 존재합니다." (『우파니사드 브리하다린야가』, IV 4,5)
'열망→의지→행위→운명', 이런 순서이다. 인간의 심연에 존재하는 열망, 그것이 인간이다. 그 열망을 잃는 순간, 인간은 그냥 흙이며 곡식의 껍데기일 뿐이다. 인간은 그 사람의 생각이다. 건강은 내가 내 육체에 투입하는 생각의 양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인간으로 우리 자신에게 바라고 훈련하는 열망만큼의 결과이다. 우리는 자신을 멋진 집으로 착각한다. 훌륭한 거주지가 없는 집엔 거미줄만 가득하다.
인간은 자신에게만 유일하고, 그러기 때문에 위대한 인생의 과업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다. 보통 우리는 스스로 두려움과 불안으로 혹은 가족적이며 사회적인 제약과 책임으로, 자신의 열망(熱望)을 찾지 않으며, 그 결과 자신을 가장 자신답게 만드는 잠재력을 실현시키지 못 한다.
쇼펜하우어는 '네페쉬'를 찾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는 내적인 그리고 외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길 촉구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장점과 단점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지 않은 힘을 발휘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위조 동전을 가지고 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남을 흉내 내는 거울 놀이는 결국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아닌 것을 자신인 양 시도하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 왜곡되고 사악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흉내를 내는 것처럼 개탄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다른 사람의 옷을 입는 것보다 더 우스꽝스럽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쓸데없음을 온 천하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인간이 '현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 것이라고 말하였다.
자신이 열망하는 모습을 상상하여 일상에서 매 순간 구현을 시도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이 원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 열망하는 자신의 모습은, 숙고를 통해, 그런 모습을 매일 새롭게 상정하고, 그것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할 때,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이루었다고 자만하는 순간, 사라지는 신기루이기도 하다. 신기루는 잡힐 수 없고, 잡히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열망이란 자신이 열렬히 바라는 희망이란 말이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이다.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군자(君子), 성인(聖人), 선비이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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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표 교수 |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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