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세종포럼] 두 천재 화가의 서로 다른 삶 :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반고흐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2-06-26 12:34:32
  • 카카오톡 보내기
  • -
  • +
  • 인쇄
인문학 특강 강사 : 최인숙 교수/경기대 한반도 전략문제 연구소 부소장

-모네: 파리미술대학 출신, 퐁텐블뢰학파, 화상들과의 관계, 전략가(유명인과의 합동전시회를, 그룹활동, 비평가들을 움직임 / 사교적 야망적
-고흐: 독학, 우체부 등 주변인들과 교류 / 폐쇄적, 오만

 

두 천재 화가의 서로 다른 삶 :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반고흐

 

 

최인숙/경기대 한반도 전략문제 연구소 부소장

 

 

서문

-두 화가의 서로 다른 삶

 

19세기 인상파 화가 중 세상 사람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화가는 모네와 고흐일 것이다. 이들은 소위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로 불리는 프랑스의 문화 융성기인 19세기에 활동한 예술가들이다. 하지만 이들 두 사람의 인생역정은 너무나 다르다. 모네는 살아생전 인상파 최고의 거장으로 명성을 날리며 부귀영화를 누렸고, 고흐는 지독한 가난과 병마로 시달리다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오늘 이 강의에서는 이 두 천재 화가의 생애와 그들의 작품 황동을 간단히 점검해 보고, 우리의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I. 클로드 모네

 

(1) 전략가였던 프랑스 주류 화가 모네

 

19세기의 거장 모네는 로댕처럼 전통을 현대로 이끈 예술의 혁신가다. 모네는 1840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유년기를 영국 해협을 마주하는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보냈다. 모네는 어린시절 학교 다니기를 싫어했다. 10대 때 초상화를 스케치하다 풍경화가인 외젠 부댕을 만났다. 부댕은 모네에게 해안을 그려보라고 충고했다.

1859년 즉, 모네 나이 열아홉 살 때 파리로 다시 온 그는 아카데미즘 화가인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의 화실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프랑스 최고의 미술대학인 파리 미술 제국대학에 입학했다. 이때 프레데리크 바지유,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등을 만나 친구가 됐다. 모네는 이들과 함께 파리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소유지인 퐁텐블뢰(Fontainebleau) 숲으로 그림을 그리러 가는 것을 즐겼다. 모네는 살롱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는 에밀 졸라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런던으로 피난을 떠났다.

1874년 모네는 그 당시 유명했던 소설가이자 사진작가인 나다르(Nadar)와 함께 합동으로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인상주의, 일출을 출품했고, 이 작품은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 , 인상파 그림으로 주목을 끌었다. 이 그룹 전시회는 1884년까지 계속됐다. 이를 통해 모네는 꽤 인지도를 높였다. 모네는 또한 로댕의 명성을 이용해 이름을 알리고 싶어 그와 함께 합동 전시회를 열었다.

결국 모네는 1890년은 눈부신 성공을 거둔다. 당시 미술계를 이끈 화랑 뒤랑-뤼엘을 이용해 여러 화상들과 거래하면서 유리한 입장을 끌어냈고 많은 그림을 미국에 팔았다. 나이 50에 모네는 예술가로서의 칭송과 재정적 성공을 누리게 됐다. 그 덕에 1883년부터 빌려 쓰던 지베르니 집을 살 수 있게 됐다. 지베르니의 모네 집에는 그의 취미에 맞게 정비한 수려한 정원과 연못이 구비돼 있어 모네에게 영감의 중요한 원천이 됐다.

모네의 그림은 더욱 충실해졌고 인상주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풍경시리즈를 그렸다. 그의 성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건 1894년 그린 루앙의 성당이다. 수련과 연못의 모티프는 그의 말년의 대작이다. 그의 친구 조르주 클레망소의 요청으로 모네는 이 그림들을 국가에 기증했고 클레망소는 1927년 오랑주리 미술관을 개관해 거기에 보관했다 모네는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와 유년 시절부터 친구였다. 모네는 86살로 장수했다.

 

 

(2) 모네의 안식처 지베르니

 

모네는 포플러낟가리연작을 그리며 단순한 모티프를 통해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빛과 그림자의 색채와 무한한 변화의 탐구에 몰두했다. 지베르니 근처의 장소들이 그림의 소재가 된 덕분에(엡트강 둑을 따라 포플러들이 줄지어 있고 근처 들판에는 건초더미가 널려 있었음) 모네는 비교적 쉽게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그 후 루앙 대성당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 성당은 지베르니에서 아주 가까이 있다. 하지만 모네는 성당이 잘 보이는 빈 아파트를 얻어 작업했다. 이 작품을 끝내고 모네는 좀 더 가까운 소재로 지베르니 그 자체에 눈을 돌리게 됐다.

지베르니는 파리 서쪽에서 80킬로 지점에 있다. 인구 500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클로드 모네가 40년간 이곳에서 산 덕이다. 지베르니는 노르망디에서 두 번째로 관광객이 많은 도시다. 첫 번째는 몽쉘미셸.

지베르니는 고대 메로빙거왕조 때부터 존재한 오래된 도시다. 중세에는 수녀원과 나병환자 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1883년 클로드 모네가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모네는 여기서 머물며 2개의 정원과 연못, 일본식 다리를 만들었고 이는 모네의 영감의 원천이 됐다.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포플러, 낟가리, 그리고 수련 연작을 그려 더욱 유명해졌다.

모네의 포플러낟가리연작은 처음에 상당한 몰이해와 조소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1891년 뒤랑-뤼엘 화랑에서 열린 모네 전시회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얻는 동시에 잘 팔렸다. 이 해는 모네의 시간이었다. 이를 본 피사로는 당분간 사람들은 오직 모네밖에 원치 않아. 게다가 하나같이 저물녘 낟가리만 찾지.” 피사로의 말대로 이 해 모네가 벌어들인 돈은 자그마치 97천 프랑이었다.

 

* 모네 그림의 변화

 

<인상주의, 일출, 1872년 작품>

 

<모네의 저물녘 낟가리(Meule, soleil couchant)>, 1891년 작품.

 

Cf: <1830년 호쿠사이의 후지산>

 

<루앙의 성당, 1893년 작품>

 

<수련과 연못, 1914-1918>

 

 

II. 빈센트 반 고흐

 

(1) 영원한 노마드, 아웃사이더 고흐

 

고흐는 1853330일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그루트 준데르트(Groot-Zundert)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레이드(Leyde) 대학 신학 교수였고, 아버지는 목사인 부르주아 가정에서 성장했다. 16살 때 집을 떠나 삼촌이 하는 헤이그의 구필&(Goupil&Cie)에서 화상 일을 했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이 회사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면서 고흐는 예술을 하나의 상품으로 보는 것을 못 마땅해했고 그로 인해 실직했다. 그 후 목사가 되길 열망했지만 신학 시험에 실패했다. 1880년 화가로 전향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때 그는 네덜란드를 떠나 벨기에 앙베르(Anvers)로 갔다. 18862월 파리로 와 정착했다.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그는 독학으로 그림과 데생을 그렸다. 고흐는 예술문화를 살찌우기 위해 미술관, 갤러리 등을 열심히 방문했다. 그는 동료 화가들과 생각을 교환하는 것을 즐겼다. 일본판화 우끼요에와 영국 판화를 공부했다. 영어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였다.

고흐는 화가 생활 10년 동안 9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오늘날 무한한 사랑을 받는 화가 중 한 사람이지만 그가 살았던 19세기에는 외면당했다. 고흐의 그림은 처음에 너무 짙고 어두웠다. 농부들의 고통을 그린 그림(자기와 같이 고통스런 사람들), 꽃 한 송이, 감자 하나, 구두 등을 보면 검정색을 많이 사용했다. 고흐는 파리에 머물 때 카미유 피사로와 가깝게 지냈고, 피사로는 고흐에게 네덜란드풍 색채와 스타일에서 벗어나 좀 더 밝고 자유로운 인상파 색체와 기법으로 나갈 것을 권유했다.

고흐는 2년간의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프랑스 남쪽으로 내려갔다. 번잡한 도시 생활과 짓누르는 살벌한 북쪽 지방 날씨에 질려 온화한 기후를 찾아 남쪽으로 떠났다. 특히 그는 거기서 그의 새로운 화법을 완성하고자 프로방스의 햇빛과 색깔을 찾고자 했다. 동생인 테오에 따르면 고흐는 먼저 아를에 들러 역사를 찾고, 그런 다음 마르세유까지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를에 도착한 고흐는 마르세유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를의 농촌에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었다.

 

 

(2) 고흐의 영혼의 문, 아를

 

아를은 마르세이유 남동쪽에서 90킬로 떨어져 있다. 2500년 된 역사 도시로 철기시대에는 지중해 연안 켈트족의 요새였다. 로마 시대의 원형경기장, 문화유적지와 예술품이 많아 역사의 도시 예술의 도시로 손꼽힌다. 이 도시에는 론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어 경치가 빼어나다. 일 년 내내 여러 페스티벌이 열려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아를의 첫 번째 경제적 원천은 관광이다.

고흐는 이 도시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큰 영감을 얻었다. 고흐가 아를에 머문 것은 18882월부터 18895월이었다. 15개월 63, 정확히 말하면 444일간 머물렀다. 여기서 그는 200여 점의 그림과 100여 점의 데생, 그리고 수채화를 완성했다. 200통의 편지도 썼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첫 편지는 18728월이다. 마지막 편지는 미완성 본으로 18907월 자살했을 때 그의 주머니에서 발견됐다. 고흐는 그의 동생 테오에게 18년 간 편지를 썼다. 이 편지들은 고흐의 명민함과 성품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증거들이다.

고흐는 아를을 온통 헤집고 다녔고, 아를의 다양한 풍경을 통해 그림을 살찌울 영감을 얻었다. 아를의 한낮에 매혹당해 정오의 태양 아래 그림 속에 흠뻑 빠졌고, 집에서는 조명을 찾았다. 프로방스의 빛과 색깔을 조합해 일본풍의 판화를 개발해야겠다는 야망도 가졌다. 이 모두를 실현하기에 아를은 최상이었다. 여름 시즌 그는 랑글루아 다리(Pont de Langlois)를 제외하고는 꽃이 핀 일본풍의 나무 그림들과 추수하는 장면을 내내 그렸다.

매혹적인 원형경기장 광장의 저녁 카페(Le café le soir), 트랭크타유 다리의 계단(L’escalier du pont de Trinquetaille), 론강(Rhône) 부두의 별이 빛나는 밤(La nuit étoilée), 라마르틴 광장의 노란집, 미레유 거리의 낡은 풍차 오두막, 리스(Lices) 거리의 공원, 랑글루아 다리(반 고흐 다리)는 모두 고흐의 수려한 그림들이다.

고흐가 아를에 머무는 동안 우정을 나눴던 사람은 우체부 조제프 룰렝(Joseph Roulin)이었다. 우체부 룰렝은 47세로 아를역에서 우편물을 분류했다. 그는 매우 귀중한 고흐의 친구였다. 룰렝은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고흐는 고참 병사처럼 매우 조용하고 심각하고 온화하다. 신경질적이지도 슬프지도 완벽하지도 행복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하지만 매우 천진스럽고, 매우 총명하며 매우 감동을 잘하며 매우 신앙이 깊다. 고흐는 자주 룰렝을 찾아가 역에 있는 카페에서 담소를 나눴고 그에게 초상화를 그려줬다. 고흐는 룰렝과 그의 가족을 주제로 20여 점 넘는 그림을 그렸다. 1989년 뉴욕 모던 아트 미술관은 5,800만 달러에 룰렝 초상화 하나를 구매했다.

 

<조제프 룰렝의 초상화>

 

 

(3) 생전에 팔린 고흐의 그림 한 점

 

고흐 생전에 딱 한 점의 그림이 팔렸다는 설이 있다. 그 그림은 현재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학교 박물관에 서 있다. ‘몽마주르의 붉은 포도밭.’ 이 그림은 1888년 그린 것으로 고흐가 죽기 몇 달 전 브뤼셀에서 팔렸다.

1889년 고흐는 브뤼셀 단체전에 참가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는 대리인인 동생 테오에게 몽마주르 붉은 포도밭을 포함해 6점의 작품을 보내도록 부탁했다. 그다음 해인 1890년 테오는 이 그림을 아나 보슈(Anna Boch)에게 벨기에 돈 400프랑(지금 돈 800유로)을 받고 매매했다.

그런데 거만한 화가 고흐는 왜 아나 보슈에게 그의 그림을 팔았을까? 예술후원자이자 화가인 이 여인은 벨기에 사람으로 빈센트와 영원한 친구 외젠 보슈의 여동생이었다. 외젠과 빈센트의 측근 테오는 아나에게 그림을 파는 것을 거절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고흐는 매우 가난해 테오가 매월 200프랑을 보내주었다. 그가 라부 여관(l'Auberge Ravoux)의 벽지도 안 바른 가장 싼 방을 빌려 살고 생활이 어려운 것을 보고 아나 보슈가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싶었다고 한다.

1906년 아나 보슈는 몽마주르의 붉은 포도밭10000프랑에 다시 팔았고 같은 해 러시아 실업가 세르게이 시슈킨(Sergei Shchukin)의 손에 넘어갔다. 1960년 시슈킨이 이 그림을 푸시킨 미술관에 기증한 이래 지금까지 거기 남아있다.

반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릴 때인 1888년 초 폴 고갱과 함께 살았다. 가을의 노란 하늘과 포도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푸른색 옷이 강조되고 충만한 가을을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그린 눈부신 광경, 태양은 포도밭 인근에 흐르는 강에 반사되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 지평선과 석양이 대각선을 이루고 있어 사람의 눈길을 끈다.

 

<몽마주르의 붉은 포도밭(La Vigne rouge à Montmajour)>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대파도>

 

<탕기영감 초상화>

 

 

결론: 두 천재 화가의 공통점과 차이점

 

1. 공통점: 인상파 화가, 일본 호쿠사이의 영향을 크게 받음

2. 차이점

1) 출생과 성장배경: 주류와/비주류(금수저/흙수저)

-모네: 파리미술대학 출신, 퐁텐블뢰학파, 화상들과의 관계, 전략가(유명인과의 합동전시회를, 그룹활동, 비평가들을 움직임

-고흐: 독학, 우체부 등 주변인들과 교류

3) 개인의 특성: 사교적 야망적/폐쇄적, 오만한 고흐

4) 결혼생활/독신생활

-모네: 대식구를 거느린 가장(아내와 7명의 자식), 그리고 86세까지 장수.

-고흐: 독신으로 살다 37세에 요절

 

*토론: 여러분은 어떤 삶을 더 높이 평가하는가? 그 이유는?

 

 

 

[저작권자ⓒ 미디어시시비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

주요기사

+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