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e)' 로 길 잃어
중요한 것이 진실과 믿음을 혼동하지 않아야... 진실과 믿음은 다르기 때문에
‘실천'과 멀리 떨어진 긍정적 사고는 되려 해로울 수도
"인간의 몸은 생각하고, 피아노를 치고, 호르몬을 분비하고, 체온을 조절하고, 세균을 죽이고, 해독하고, 아기를 잉태하는 일을
한꺼번에 수행한다. 이를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지성이다. 지성은 우리 몸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하도록 만드는 한편, 충만함으로 향하는 길을 선택하도록 이끈다."(디팩 초프라의《완전한 행복》중에서)
고도원은 위의 문장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굳이 지성이 없어도 인간의 몸은 작동할 수 있습니다. 호르몬을 분비하고 아이도 낳을 수 있습니다. 마치 글을 몰라도 말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을 알면 말도 달라지듯 지성을 갖추면 모든 것의 격과 수준이 달라집니다. 삶의 방식이 풍성해지고 그 풍성함이 다른 사람의 삶에도 넉넉함을 안겨줍니다." 아직도 지성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미숙으로 지성에 대해 잘 배웠다.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 , '3 지(知)'에서,
- 지식은 주로 정보, 물질의 원리를 탐구하는 것, 그리고 그걸로 인간이 누리는 부를 확장하는 것이다. 고미숙은 이걸 '기술지(技術知)'라 부른다.
- 지성은 '문명지(文明知)'라고 정의한다. 물질을 알고 부를 확장하면 그걸 어떻게 나누고, 이걸 어떻게 인간 삶에 적용할까, 이 문제가 부각되는데, 그럴 때 관계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 지성이다. 기술지와 접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을 생각하며, 인문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 그 다음은 지혜이다. 인간은 천지를 연결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너머가 궁금하다. 그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묻게 된다. 그리고 지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질문하는 것이 지혜이다. 이 영역으로 가면 기술지와 문명지처럼 손에 잡을 수 있는 게 없다. 거대한 무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생명과 우주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되면 그 보이는 모든 것을 해체해 버린다. 그걸 지혜라고 부르는데, 동시에 영성(靈性)이라고도 한다. 그걸 인류학적 용어로 쓰면 '자연지(自然知)'이다. 이는 종교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고미숙에 의하면,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을 알려면 이 지식, 지성 그리고 지혜의 인드라망 순환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 순환을 통해 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방향이 결정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인간다운 앎은 지혜, 영성이다. 그래 이것이 바탕이 되어야 기술지와 문명지도 그 활발한 역동성을 갖게 된다. 왜 그런 가?
- 지식은 계속 기술을 확대해서 인간 마음에 소유에 대한 증폭, 곧 욕망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싶고 누리고 싶어지 게 하는 거다. 이 마음을 해체하는 게 지혜인데, 이 지혜가 개입하지 않으면 무조건 욕망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우리가 더 자유로워질 수 없는 거다.
- 한편 지성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많은 시행착오와 토론, 논쟁, 교육 등을 주도하는데, 이 지성이 지혜와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엘리트와 대중의 차이가 강화되는 쪽으로, 그래서 엘리트가 대중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식으로 나가게 된다.
이런 생각 속에서 오늘 아침은 이런 제목의 칼럼을 읽었다. "실천 없는 '무지성' 믿음은 해롭다". 잘 될 거라는 믿음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 거나 잘 될 거라고 생각해야 실제로 잘 된다는 등 많은 자기계발 연사들이 긍정적 사고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이렇게 나의 내적 사고방식이 외부 세계로 전달되어 어떤 실체가 있는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는 믿음은 생각보다 흔히 나타난다. 나와 딸도 그런 경향이 강하다. 대책 없이 믿기만 한다, 잘 될 거라고. 그러면 '무지성'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내가 경기를 보면 꼭 지니까 안 보겠다고 하는 것이나 행운의 색깔 등에 대한 믿음, 어떤 우주적 ‘기운’에 대한 믿음과 내가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믿음 등 많은 이들이 ‘마음’에 어떤 초자연적인 효과가 생각하는 듯한 경향을 보인다.
물론 긍정적인 믿음이 어떤 자기 예언적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도 존재한다. 예컨대 자신은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으며 사람들은 모두 다 자신을 싫어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경우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관계를 만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어차피 해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노력하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걸 갖고 있고, 나와 잘 맞는 사람도 어딘 가에 있을 거라는 믿음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내가 노력을 해본다든가 새로운 기회나 잘 맞는 사람을 찾아보는 것처럼 실천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 간절히 바라기만 하면 꿈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보는 ‘실천'과 멀리 떨어진 긍정적 사고는 되려 해로울 수 있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하면 '어떻게든지 잘 될 거라'는 믿음은 긍정적인 것을 떠나 다소 무책임해 보이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이 하면 잘 될 거라는 믿음 하나로 단 몇 달 만에 별 다른 준비도 없이 시작했다가 현실이 예상과 너무 다르다며 곤혹스러워하던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별 다른 준비도 없이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경험도 공부도 없이 그냥 자신감 하나로 밀어붙이던 일이었기 때문에 옆에서 보기에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되려 자신이 망할 가능성은 0이라고 자신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는데 자기가 하면 다 잘 될 거라는 믿음 하나로 사업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 큰 패착이었다. 이상은 박진영 심리학 칼럼니스트의 주장을 갈무리하여 공유하는 거다.
박진영 심리학 칼럼니스트는 "어떤 믿음이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구체적인 계획과 준비, 목표 설정, 실패가 따라야 한다. 실천 없이 믿음만 가지고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느 날 기적같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을 하든 항상 예기치 못한 장애물을 만나게 되는데 다 잘 될 거라고만 생각하면 정작 작은 장애물 앞에서도 크게 당황할 것 같기도 하다. 믿음이 현실이 되게 만드는 것은 오랜 준비와 지난한 노력임을 기억하자"고 했다.
진실과 믿음은 다르다. 진실은 단지 믿음이 아닌 관찰과 증거를 기반으로 한 진실을 말한다. 중요한 것이 진실과 믿음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진실과 믿음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잘 구별하지 않는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이 진실로 통한다. 이런 위험으로 부터 벗어나는 길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을 품어보아야 한다. 내가 믿는 것이 진실인가? 가짜가 아닌가? 이야기가 진실이 아닐 때, 우리는 오히려 더 강한 믿음을 필요로 한다. 반면 우리는 진실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 어디에서 나온 것이든 신성시 해야 한다. 이처럼 진실에 헌신하는 태도야 말로 근대 과학의 기저를 이룬다. 그러니까 데카르트가 말하는 '방법적 회의", 즉 자신의 생각 의심하면서, 우리는 진리에 다가가려는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어떤 것을 믿지 말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의 자유를 위해서이다. 자유는 일체의 모든 권위로부터 저항하고 비판하는 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내 믿음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이젠 각자의 몸에 박힌 돌멩이를 빼낼 시간이다.
죄와 벌/박화남
맞아야 할 돌이라면 내가 대신 맞겠다
얼어 있는 호수가 안고 있는 돌멩이
더 깊이 몸에 박힐수록
아픈 곳이 녹는다
누구나가 깊디깊은 곳에
저마다의 돌멩이가 박혀 있습니다.
소리 없이 깊이 박혀 있다가 삶의 어느 순간
생채기를 내고 아픈 통증을 안겨주곤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합니다. 그 돌멩이를 사랑과
연민으로 감싸 안아 영롱하고 아름다운 진주로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박힌 돌멩이가 크면
클수록 더 큰 진주가 만들어집니다.
원래는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이야기 하려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반지성주의'하면 트럼프 전대통령이 소환된다. 지금 현 정부도 비슷하다. 지성주의 무엇인지도 모르고 굥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세계는 코로나19 대유행, 기후변화, 교역질서와 공급망의 재편, 식량‧에너지 부족, 무력분쟁 등 글로벌 난제에 직면했다. 개별 국가는 초저성장, 실업, 양극화로 인해 공동체의 위기를 겪고 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는 민주주의 위기 때문에 잘 작동하지 않는다.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렸다.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는 과학과 진실을 전제로 이견을 조정하고 타협한다. 그러나 반지성주의는 집단적 갈등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각자 믿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며 다수의 힘으로 이견을 억압한다. 국내외의 위기와 난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보편적 가치인 ‘자유’를 정확하게 인식 공유해야 한다.” 굥이 취임사에서 한 말이라 한다. 믿기지 않다. 그는 말과 글이 큰 의미가 없는 사람이다.
언젠가 중앙일보의 윤석만 기자가 한 말이다. "트럼프 식 가짜 민주주의는 3A로 요약 된다. 반-자유주의(Anti-liberalism), 반-지성주의(Anti intellectualism),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 가짜뉴스). 지난 2016년 선거에서 트럼프는 러시아 댓글부대(IRA)의 가짜 뉴스 덕을 보았고, 당선 뒤에도 그는 비판을 가짜뉴스로 치부하고 '대안적 사실'이라며 거짓말도 서슴치 않았다. 그의 반-자유주의는 다양성과 관용, 소수 배려가 사라지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유세계의 동맹국보다 독재정권을 선호하고 헌법 같은 규범을 공개적으로 멸시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코로나-19 대응처럼 전문가 의견과 과학적 사고를 무시하는 반-지성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3A, 즉 반-자유주의, 반-지성주의 그리고 대안적 사실(가짜 뉴스)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곳에서는 패거리 정치가 일어난다. 증거에 기반한 이성적 논의, 이견을 받아들이는 다원성이 패거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를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규정할 뿐이다. 우리의 정치 풍토도 그런 모습이다. 패거리의 다른 말이 '팬덤'이다. 정치가들이 문제이다. 그들은 다양한 이익과 갈등을 대의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략적 이슈를 내세워 갈등을 조장하고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에만 열을 올린다. '팬덤'을 기초로 동원된 패거리들 사이엔 이성과 합리가 숨 쉬지 못한다. 합의와 토론보다는 '너 죽고 나 사는 목숨 건' 투쟁만 존재한다. 해결책은 서로를 적으로 가르지 말고, 상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 긋기와 몰아내기는 배제의 논리다. 이제까지 국가는 통치자와 귀족, 평민, 노예로 금을 그었고 종교는 불신자와 이교도, 이단으로 찢어져 전쟁을 일으키고 파문하며 제거했다. 경제적 인간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갈라 착취와 저항으로 대결 시켰고 독재권력은 그 비판자들을 반동과 역적으로 잡아들이고 자유로운 현대 학문조차 찰스 퍼시 스노의 <<두 문화>>에서 보듯 과학과 인문학의 상호 무지로 배척한다. ‘자유롭고 평등하고 아름다운’ 인간적 삶’은 금기와 무지, 몽매와 편협이 빚는 ‘배제의 논리’로부터 이해와 관용, 연대와 제휴의 ‘포용의 논리’로 살 만한 세상을 향해 진화한 모습일 것이다. 이게 우리 인간의 영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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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표 교수 |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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