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東-13] 연나라 진개의 조선 침략과 부여 발조선의 분화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0-08-05 01: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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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박동(朴東) 박사와 함께 하는 ‘동이족과 한민족’

[그림] 연나라 진개의 침공 이전 조선·요동 형세도

[자료] 구글지도 위에 필자가 그림

 

 

연나라 진개의 조선 침공은 고조선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무엇보다 조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고, 얼마만큼의 땅을 잃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수많은 논란이 존재한다. 먼저, 조선의 위치와 관련해서 전국책사기소진열전에 거의 동일한 내용의 기록이 등장한다. 여기서 소진은 연의 동쪽에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 누번이, 서쪽에는 운중, 구원이, 남쪽으로는 호타하, 역수가 있습니다...남으로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으로는 대추와 밤이 풍족합니다.”이를 통해 연나라는 대추와 밤이 많이 나고 밭은 갈지 않는 산악지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연나라가 이 시기 화북평원의 계(, 북경)에 있었다면 대추와 밤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개의 침공으로 빼앗긴 실지의 범위는 얼마나 될까? 사기흉노열전에 따르면, ()나라 장수 진개(秦開)는 호()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후 동호(東胡)를 습격하여 동호가 1천여 리를 물러났다고 한다. 그리고 연나라는 조양(造陽)에서부터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았고, 그 내에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지위략에서는 연은 장군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 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朝鮮)의 세력은 약화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동안 수많은 논쟁이 제기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실지가 1천리인가 아니면 2천리인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사기에서는 동호가 1천리 퇴각했다고 했고, 삼국지위략에서는 땅을 2천여리 취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거리와 땅의 개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못해 진개가 대동강까지 쳐들어 왔다는 터무니없는 설들을 제기해왔다. 중국 고대 사서에서 땅을 표기하는 방법은 독특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원래 땅은 동서 곱하기 남북(平方)이다. 그런데 중국의 사서에서는 동서 길이 더하기 남북 길이 방()을 땅의 넓이로 기록했다.

 

대표적으로 관자는 땅을 거론할 때 방()이라는 동서남북 표기를 했다. 여기서 관자는 춘추시대 패자가 된 환공이 차지한 제나라 땅의 넓이가 방오백리(方五百里)라고 기록했다. 동서 250, 남북 250리라는 것이다. 관자77편 지수(地數), 78편 규탁, 81편 경중 을 등에도 국토토지 계산 방법에 대한 기사가 등장하는데 모두 땅을 이야기 할 때에는 동서 더하기 남북으로 계산하고 있다. 이중 지금 땅이 동서로 28천리, 남북으로 26천리입니다. 천자가 중앙에 있고, 나라의 사면의 한 면은 만리 이상입니다.”라고 한 기록을 보면 동서남북의 길이는 각각 2면의 길이를 합한 것이고, 이를 모두 합하면 54천리이다. 여기서 한 면이 1만리 이상이라는 것은 네 면의 길이를 단순히 합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기전국책등에서도 땅 표기는 관자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삼국지위략에서 말하는 땅 2천리는 정사각형 땅의 경우 동서의 길이와 남북의 길이가 각각 1천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이라는 표기를 하던 안하던 땅은 모두 동서 더하기 남북으로 표기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사기에서 기록한 1천리와 동일한 내용을 반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개의 공격은 연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기 이전, 즉 연소왕 초기인 기원전 300~281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296년에 중산국이 조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는데, 필자가 보기에 조와 연이 조선, 요동, 중산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로 인해 발조선 세력은 크게 세 세력으로 분화한 것으로 나타난다.

 

발조선의 주력은 현재의 천진시 동쪽의 요동으로 후퇴하여 번조선을 유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발세력 중 하나는 동북방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부여국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발족 중 해상 세력은 산동반도를 거쳐 한반도 나주 발라(發羅)로 이주하여 마한을 건국한 것으로 분석된다. 삼국지후한서의 한조에는 진한인들이 대대로 말하길, ()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고 했으니 마한은 이미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기 전인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성립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발세력이 한반도로 이동한 시기는 준왕 즉위 이전의 진개 공격 시기가 거의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우 마한은 발세력이 이동한 기원전 3세기말 경에 성립한 것으로 분석된다.

-시리즈 14편에 계속됩니다

 

▲  박동(朴東) 박사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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