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東-16] 동이 왜의 형성과 이동

안재휘 기자 / 기사승인 : 2020-08-26 01:3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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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박동(朴東) 박사와 함께 하는 ‘동이족과 한민족’

[그림] 209, 212년 포상팔국전쟁의 형세도

[자료] 국립김해박물관에 촬영한 지도에 필자가 그림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동해안에는 수많은 동이족들이 해상을 중심으로 농경과 무역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영산강 유역에 선주한 나씨와 노씨 그리고 목씨는 절강성 온주와 항주 등에서 일찌감치 한반도로 이주해온 것으로 분석된다. 그리고 나주 반남과 영암 시종 일대에는 부여 발계 박씨와 여씨들이 자리잡고 마한 전체 중심축을 구축했다. 오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오씨들이 산동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한반도의 해주 지역에 대규모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중 일부는 전남 해안지역으로도 이동하여 나주와 해남, 보성, 화순 등지에 정착했다. 해주 오씨, 나주 오씨, 보성 오씨, 동복 오씨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오씨들이 실제로 강력한 해상세력이었다는 점은 나중에 개성의 왕건 세력과 연합하여 고려를 건국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오·월족이 한반도로 이주한 이후 중국 남부를 통일하고 있던 초나라도 BC 223년 진나라에 멸망하여 이들도 한반도로 이주해온 것으로 파악된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수많은 동이족들이 한반도로 대규모 이주를 하였다. 진시황의 통일 이후 동이족과 왜인들의 기록이 중국사에서 사라져 버릴 정도였다. 진시황은 분서갱유로 유생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고, 씨족을 해산하는 개산위민’(皆散爲民) 정책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각종 진역에 정복민들을 동원하였다.

 

한반도로 이주해온 동이 왜와 여타 동이 세력들은 끊임없이 한반도 서남부로 이동하여 바닷가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들을 만들고 이들 간의 연맹체인 포상팔국(浦上八國) 연맹을 구축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서기 49년 김해지역에 김수로의 강력한 가야국이 건국되자 이들과 갈등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김수로의 가야는 강력한 철제 무기를 바탕으로 건국하여 서기 3세기초까지 왕조를 유지했다. 그러나 라, , 래 씨족 및 오··초인들과 지속적으로 갈등관계를 유지했다.

 

동이 왜인들이 동진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수차례 신라를 공격했다. 삼국사기에는 왜와 관련된 수많은 기사가 등장하는데, 왜가 30번 이상 신라를 침공한 것으로 나온다. 이에 따라 삼국사기에 나오는 왜()가 누구인지에 대해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왔다. 최근의 연구결과 삼국사기의 왜는 대체로 동이 왜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수시로 신라를 넘나드는가 하면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한다. 4세기 말 ~ 5세기 초에 수백 척의 배를 동원하거나 수시로 신라를 포위하는 등의 행동을 구사할 수 있는 존재는 한반도 내에 존재한 세력일 수밖에 없다. 당시 열도 왜는 선박 건조 기술이나 철제 무기 수준이 한반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 동래는 산동 래이족들이 이주하여 독로국을 건설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한반도 내 왜에 대해 후한서동이전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요동태수 제융(祭肜)의 위세가 북방을 떨게 하고 명성이 해외에까지 진동하니, 이에 예···한 등이 만리 밖에서 조공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융이 요동태수가 된 것은 서기 41년인 건무 41년이었는데, 후한서의 범렵은 이 시기의 왜를 예··한과 더불어 동이족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그것도 기록 순서가 예···한으로 되어 있어 중원으로부터의 거리 순서를 나타내거나 적어도 병렬로 나열되어 왜가 예··한과 거의 동일한 위상을 지닌 존재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여기서 왜는 환발해만 유역의 동이 왜, 즉 오··, 래이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된다.

 

동이 왜와 신라-가야 간 갈등은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209년과 212년에 나주의 발라국(發羅國)으로 비정되는 보라국(保羅國)과 연대한 가야 포상팔국은 209년에는 아라가야 및 신라, 그리고 212년에는 김해 금관가야 및 신라와 대전쟁을 벌인다. 이것이 바로 포상팔국전쟁이다. 두 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한반도 남부는 엄청난 전화에 휩쓸리게 된다. 그 결과 가야는 212년 전쟁에서 패배하여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사라진다. 이후 보라(발라) 세력과 열도 사이의 교류가 지속되면서 열도로의 인구와 문물의 이동도 꾸준히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포상팔국전쟁 이후인 3세기 중엽 한()에 대해 기록한 후한서한조와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조에는 마한이 남쪽으로 왜와 연접하였다고 했고, 변한의 남부에도 왜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후한서삼국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한반도 남부 해안 지역에는 모두 왜()가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바닷가나 큰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 동이 왜와 동일한 습속을 이어받았다. 일본 민족의 조상으로 간주되어온 왜는 열도가 아니라 중국의 절강성 지역을 시초로 환발해권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한 동이 왜족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서남부를 거쳐 서기 2세기경 열도로 이주한 동이족을 지칭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시리즈 17편에 계속됩니다

 

 

박동(朴東) 박사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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