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속에 품은 빛’ 전시회가 한창인 갤러리에서 만난 류지안 작가. 사진 C영상미디어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두바이 다운타운디자인(Downtown Design Dubai)’이 열렸다. 30여 개 국가, 250여 개의 브랜드 작가 및 디자이너가 참여하는 중동지역의 디자인·공예 분야 최대 규모 박람회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준용·류지안·손대현·이상협·조성호·허상욱 등 여섯 작가의 작품 26점을 선보였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23년 1월 윤석열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 국빈 방문을 계기로 중동시장에 한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이번 참가를 추진했다.
참가자들 중 류지안 작가는 윤석열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부부에게 선물한 달항아리 ‘더 문 화이트’의 제작자로 화제가 된 바 있다. 이번에도 달항아리를 포함한 7점을 전시했다. ‘더 문 화이트’는 여느 달항아리와는 다르게 보는 각도에 따라 저마다의 색을 비쳐 보석을 떠올리게 한다. 조개껍데기를 썰어낸 조각, ‘자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류 작가는 모든 작품의 공통 소재로 자개를 활용한다. ‘시간’으로 관통되는 그의 작품세계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소재다. 자개가 오랜 시간 바다에 잠겨 갖가지 빛을 내기까지 걸리는 시간, 자개를 일일이 손으로 부숴 붙이는 작업 과정이 모여 작품이 탄생한다. 그의 작품을 시간으로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류 작가는 세공기법은 전통식을 적용하되 표현방식과 결과물은 현대예술을 추구한다. ‘더 문 화이트’의 경우 자동차나 요트를 만드는 소재 강화플라스틱(FRP)으로 빚어진 달항아리에 자개를 붙였다.
류 작가는 그의 작품에 대해 “흐른다”고 표현한다. 조각들이 전체를 이뤄 만든 빛이 역동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류 작가에게 자개 조각은 오늘날 그를 이룬 모든 시간과 관계를 의미한다.
‘고요 속에 품은 빛’ 전시회가 한창인 갤러리에서 류 작가를 만났다. 인터뷰 테이블 뒤로 전시된 작품들이 오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2023 두바이 다운타운디자인에 7점을 출품했다. 중동 진출은 이번이 처음이었나?
▲2019년 처음으로 참가했다. 전시회 측에서 내 작품을 보고 먼저 연락을 해왔다. 그전까지 두바이는 생각하지 못한 시장이었기 때문에 기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갔는데 전시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좋은 반응 덕분에 2021년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올해는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해 참가하게 됐다. 그곳을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내 경험을 공유하면서 좋은 작가 분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
-전시를 혼자 준비할 때와 차이점이 있었나?
▲이전에는 그림을 보내고 전시장에 거는 것까지 모든 걸 알아서 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문체부의 도움이 컸다. 무엇보다 한국 작품들이 메인 구역에 있었다고 한다. 감격스러웠다.
-류지안 작가 하면 ‘달항아리’가 먼저 떠오른다.
▲달항아리는 내 시그니처인 ‘Beyond the Ocean’ 시리즈 중 하나다. 처음부터 달항아리를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시작은 바다였다. 형태가 달항아리일 뿐 그곳에 바다를 담았다. 밤바다, 반짝이는 윤슬(햇빛이나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물결), 섬을 감싸며 일렁이는 파도, 노을 지는 바다. 이런 것들을 떠올리다보니 달이 연상됐다. 달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자개 달항아리가 나왔다.
-반짝이고 각각의 색을 내는 소재가 자개뿐인가?
▲내 모든 작품의 공통점은 정말 작은 조각이 모여 이뤄졌고 반짝인다는 거다. 자개 조각 하나하나가 쌓여 보석처럼 밝게 빛나듯 사람도 지난날의 생각과 경험으로 시행착오를 겪은 뒤 성숙해지지 않나. 과거는 마냥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여서 오늘의 나를 만든다. 내 성격이 밝은 편이다. 작품은 작가를 따라간다는데 그래선지 어두운 것은 표현하고 싶지 않다. 작품을 통해 긍정적이고 활기찬 생명력을 전하고 싶다. 뭐든 고여 있으면 썩기도 하고 죽기도 하지 않나. 내 작품이 고이지 않고 계속 흘러가기를 바란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흐르다 찬란했으면 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싶다.
-자개를 선택한 이유가 단순히 다양한 빛을 내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 자개는 삶의 터전이 있는 재료다. 내가 자개를 좋아하는 건 자개가 시간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자개는 언제 생겼을지 모르는 그 바다 안에서 오랜 세월 쌓인 층을 통해 빛을 발산한다. 다이아몬드도 세공에 따라 달라지듯 내가 자개를 어떻게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과정이 매력적이다.
-어떤 빛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작품이 달라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내 작품은 자연광에 놓였을 때 제일 예쁘다. 바다에서 촬영한 적이 있는데 정말 아름다웠다. 휴대폰 카메라로 막 찍어도 너무 좋더라. 내가 감성적인 사람이 아닌데도 자개가 고향에 와서 좋은가 싶을 정도였다(웃음). 재료와 작품을 대할 때 어떤 생각을 갖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류 작가는 자개를 ‘내 인생’이라고 말한다. 나전칠기 명인(유철현 작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자개 틈에서 놀고 자랐다. 흔한 장난감과도 같았던 자개가 다르게 느껴진 건 미국 뉴욕에서 디자인 공부를 할 때였다. 재능이 많은 사람이 모인 그곳에서 류 작가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자개를 떠올렸다. 한국에서는 전통공예 소재로 보는 자개를 글로벌 브랜드들은 하이엔드 주얼리나 시계 등에 들어가는 보석으로 여기고 있었다. 같은 자개를 다르게 보는 시각이 재밌었다고 한다. 류 작가는 그만의 방식으로 자개를 해석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세공 기법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류 작가는 자개 자체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소재와 융합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했다. 나무에 입혀보고 메탈에도 입혀보고 심지어 자동차나 요트를 만드는 FRP에도 자개를 붙여봤다. 흙으로 빚은 항아리에 자개를 더했다면 ‘더 문 화이트’는 나올 수 없었다. 류 작가는 융합에 한계가 있는 재료라고 해도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갈 것이라고 했다.
이제 자개 작품을 보면 류 작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사실 류 작가의 작품은 국빈용 단골 선물이었다. 지난 4월 조 바이든 대통령 부부에게 선물한 사진이 공개된 후 류 작가의 작품을 알아본 팬들이 누리소통망(SNS)을 통해 알리면서 ‘국빈 선물 달항아리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것이다.
-한 장인의 작업 영상을 찾아봤다. 자개를 하나하나 손으로 부수는 노고가 엄청나더라.
▲나는 직접 작업하지 않는다. 내가 공예가나 장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다. 세공 기법을 배우긴 했지만 작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디자인 전공자로서 어떻게 하면 더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결국 내 작품에서 중요한 건 담고자 하는 이야기다. 내 작업은 각 분야의 장인 선생님들과 ‘협업’으로 이뤄진다. 내 나이보다 오랜 시간 기술을 익히신 분들이다. 그분들의 시간을 존경하며 그 시간도 작품에 녹이고 싶었다. 장인 선생님들과의 협업은 내 작품 안의 또 다른 이야기가 돼준다.
-옛 방식에 익숙한 장인들과 협업하는 과정이 어렵진 않나?
▲함께 일한 지 10년 정도 됐는데 초반에는 힘들었다. 내가 원하는 색감이나 재료, 기법 등이 장인들에겐 낯설었던 것 같다. 이견 조율 과정에서 어려울 때가 있었지만 당연히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은 장인들이 “이런 색은 어떤가”, “더 새로운 걸 해봐라”라고 말한다.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의 기준이 있나?
▲지금까지 만족을 느낀 적이 없다. 작품이 완성된 순간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잘하고 싶단 욕심이 생긴다. 예를 들어 자개를 오브제에 담았더니 만족스럽지 않아서 달항아리에 담았고 그것도 만족스럽지 않아서 큰 화판에 담게 됐다. 전에는 빛의 흐름을 표현했다면 이제는 반짝임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점점 새로운 걸 하고 싶어진다.
-가장 기억에 남는 평가를 꼽는다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 알아줬을 때가 제일 기쁘다. 일렁거리는 바다를 표현한 작품이 있다. 계속 순환하는 에너지를 표현한 작품인데 정말 많은 분들이 “저 작품은 바다 속 어딘가에서 깎이고 깎인 것 같다. 바닷가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내 생각을 읽어주셔서 감사했다.
-류지안 작가를 뭐라고 수식하면 될까?
▲현대미술가 혹은 현대자개예술가? 아티스트? 내 작업을 전통기법이라고 말할 순 없다. 끊음질, 타발법 등의 세공법을 쓰지만 자개 외에는 전통적이지 않다. 자개 자체로 충분히 빛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자개를 어떤 틀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지 않다. 꼭 자개를 한다고 해서 전통을 계승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하는 방식이 후세대가 봤을 땐 전통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미술을 하는 데 의의를 둔다.
-앞으로 류지안의 시간은 어디로 흐를까?
▲10주년을 기점으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고 싶다. 대형회화 작업을 하고 있고 설치미술도 꼭 해보고 싶다. 자개가 각도에 따라 반짝이는 모습을 공간적으로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자개’ 하면 류지안이 떠오르면 좋겠다. 글로벌하게!
이근하 기자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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