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는 <<도덕경>> 전편을 통해 '부쟁(不爭)'을 강조해
'부쟁'에는 노자 사상의 핵심인 ‘무위자연’과 평화, 공정이 응축
노자가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이 '비움'과 '줌'이다
빔이란 모든 가능성의 잠재 태이며, 창조성의 원천이다.
노자 <<도덕경>>의 마지막 장, 제81장을 오늘로 읽기를 마친다. 이제야 노자의 생각을 좀 알 것 같다. 이 마지막의 주제는 "성인지도(聖人之道) 위이부쟁(爲而不爭)"으로 '성인의 도는 일을 도모하지만 다투지 않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베풀지만, 그 공을 과시하지 않는다'로도 읽을 수 있다. <<도덕경>> 제1장이 총론이었다면, 제81장은 결론이다. <<도덕경>>은 도(道)로 시작하여, 부쟁(不爭)으로 끝난다. 이를 연결 지으면 ‘도는 곧 부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쟁투(爭鬪)가 난무하고 그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피폐 되어 가는 험난한 시대를 살면서 내린 결론일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 전편을 통해 '부쟁(不爭)'을 강조하였다. "상선약수(上善若水)"로 시작되는 제8장에서는 "수선리만물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고 했고, 제22장에서는 "부유부쟁(夫唯不爭) 고천하막능여지쟁(故天下莫能與之爭)-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의 어떤 것도 그에 맞서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제68장에서는 "선용인자위지하(善用人者爲之下) 시위부쟁지덕(是謂不爭之德)-사람을 잘 쓰는 사람은 스스로 아래에 거하니 이를 일컬어 부쟁지덕이라 한다"고 했고, 제81장에서는 "성인지도(聖人之道) 위이부쟁(爲而不爭)-성인의 도는 일을 도모하지만 다투지 않는다"는 말로 <<도덕경>>을 마무리하고 있다.
'부쟁'에는 노자 사상의 핵심인 "무위자연"과 평화, 공정이 응축되어 있다. 자연은 무위하고 다투지 않는다. 가을은 겨울을 이기려고 다투지 않고 겨울도 봄을 이기기 위해 다투지 않는다. 가을은 때가 되면 묵묵히 자신을 비우고 겨울에게 때를 넘겨주고 겨울 또한 때가 되면 따뜻한 봄을 위해 자신을 버린다. 다투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가을이 있고, 또 다른 겨울이 있게 된다. 각자의 분수와 영역을 지키면서 서로 다투지 않기에 세상은 평화로워진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가지면 분쟁(分爭)이 발생하지만, 욕심을 비우면 '부쟁(不爭)'하게 되고 세상은 공정해진다.
노자는 자신의 능력을 베풀고, 진리를 말하고, 깨달음을 전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한다. 그 성인은 자신의 가진 것을 자신의 울타리에 쌓아 놓지 않는다. 소유에 대한 집착은 파멸을 가져올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깨달음을 전하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큰 복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잘 안다. 주었지만(與), 더 많아지고(多), 베풀었지만(爲) 더 갖게(有) 된다는 노자의 논리 속에는 쌓지 말고 베풀라는 성인의 삶이 있다. 통장에 돈을 쌓아 놓아도 내가 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통장에 찍힌 숫자와 금의 무게만큼 삶은 더 짓눌리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노자는 성인은 쌓아 놓지 않는 사람(聖人不積)이라고 정의한다. 그럼 지금부터 한 문장 정밀 독해를 한다.
信言不美(신언불미) 美言不信(미언불신) :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않다.
善者不辯(선자불변) 辯者不善(변자불선) : 선한 사람은 변론하지 않고, 변론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좋은 사람은 따지지 아니하며, 따지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좋지 아니하다.)
知者不博(지자불박) 博者不知(박자부지) : 참으로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하여 떠벌리는 사람은 참으로 알지 못한다.
여기서 ‘언(言)’, ‘선(善)’, ‘지(知)’는 성인의 덕목이다. 이는 진실한 말, 뛰어난 능력, 깨달음이다. 그런데 이런 덕목은 겉으로 보기엔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는다. 예쁘게(美), 수식된 말이 아니고, 논리(辯)로 무장된 능력도 아니고, 이것저것 다 아는 박식(博)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자의 이런 생각은 역설적 글쓰기 방법이다. 우리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진실, 능력, 깨달음에 미혹되어 있다. 진실을 보지 못하는 눈으로 보면 잘 꾸며진 것에 마음이 홀리게 된다. 진실과 본질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여기서 ‘신(信)’은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으로 구성되어 있어 인간의 언어와 관련된 것으로 읽는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읽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 인간의 말이 허황되지 않고 천지의 도에 합당하는 성실성을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 말의 내용이 사실과 부합되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특히 통치자의 말은 반드시 증명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통치자의 말은 믿을 수 있는 말들이고, 또 그 말들의 실천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만 확보되어도 우리는 ‘감기식(甘其食)’하고 ‘미기복(美其服)’하고 ‘안기거(安其居)’하고 ‘락기속(樂其俗)’ 할 수 있게 돌아간다. 사는 일이 감미(甘美)롭고, 안락(安樂)할 수 있다는 거다.
‘신(信)’과 ‘미(美)’의 ‘정언약반(正言若反)’적인 댓구 다음에 제시하는 것이 ‘선(善)’과 ‘변(辯)’의 문제다. 리더는 본성, 심성이 선해야지, 변(辨)해서는 안 된다. 여거서 ‘선’이란 언어를 초월하는 박(樸, 통나무)의 선이다. 짜르고 쪼개고 따지고 하는 ‘변론의 선’이 아니다. 이런 '변론의 선'은 사람을 입은 정복할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정복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진정한 정치 지도자는 말로써 사람을 정복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박(博)"이란 '박학'이 아니라, '박식'이다. 학자들 중에서도 진짜 박식한 자가 있는데 별 쓸모가 없다. 이 세상 사물을 너무 많이 아는 자들은 참다운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특히 정치 지도자의 박식은 질병이다. 박식하기 때문에 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지 않고, 참모를 거느릴 수 있는 역량의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 다음 문장은 주제가 바뀐다.
聖人不積(성인부적) 旣以爲人(기이위인) 己愈有(기유유) : 성인은 쌓아 놓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베풀지만, 더욱 더 많이 가지게 된다.
旣以與人(기이여인) 己愈多(기유다) : 사람들과 더불어 쓰지만, 더욱 더 많아진다.
天之道(천지도) 利而不害(이이불해) :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롭게 하지 않는다.
聖人之道(성인지도) 爲而不爭(위이부쟁) : 성인의 도는 일을 도모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성인의 도는 사람을 위해 잘 하면서도 사람과 다투는 법이 없다.)
여기서 ‘적(積)’은 '쌓아 두는 것'이다. 지식이든 돈이든 쌓아 두는 것은 리더가 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재화를 쌓아 두지 아니할수록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지식을 전유하지 않을수록 더 창조적인 인간이 된다. 이게, 정치적으로 말하면, '무위정치의 마지막 덕성'이고, 동시에 <<도덕경>>에서 노자가 주장하는 <덕경>의 마지막 덕성이 아닐까?
사실 남을 위해 자기를 버릴수록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고, 남에게 주면 줄수록 더 풍요롭게 된다. 노자가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이 '비움'과 '줌'이다. 도올 김용옥은 이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0세기는 비움의 세기가 아니라, 채움의 세기였으며, 줌의 세기가 아니라 가짐의 세기였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나는 소유한다'였으며, '나는 소유한다'는 '나는 소비한다'와 등가의 가치를 지녔다. 소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소유해야 하고, 소유하기 위해서 주체와 객체를 모두 물건으로 만든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죽음의 관계가 된다."
<<도덕경>>의 마지막 문장은 "天之道(천지도) 利而不害(이이불해) 聖人之道(성인지도) 爲而不爭(위이부쟁)"이다. 여기서 하늘과 성인이 대비되고 있다. 자연은 세상을 이롭게 한다. 비를 내려 만물을 생육하게 하고, 적당한 온도로 세상을 품어준다. 나무와 숲은 사람들에게 산소를 내뿜고, 사계절은 만물의 생존에 리듬을 만들어준다. 자연의 그 어느 하나도 우리에게 베풀지 않음이 없다. 이렇게 아낌없이 베푸는 ‘천도(天道)’의 특징은 베푼 것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거다. 권력자는 국가라는 것을 만들어 세금, 부역, 전쟁의 의무 같은 것을 바란다. 자연의 원리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성인은 자연의 원리를 본받기에 자연의 아낌없이 주는 모습을 그대로 실천한다. 자신의 공을 과시하고 자랑하지 않기에 영원히 지도자로 존경받을 수 있는 거다. 이것이 ‘성도(聖道)’다. 그것을 다시 말하면, ‘부쟁(不爭)’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존재하는 것은 생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성하는 것은 빔(虛)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비어 있는 것이 된다. 비어 있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빔이란 모든 가능성의 잠재 태이며, 창조성의 원천이다. 빔이 없으면 창조는 불가능하다. 우주도 비어 있는 것이고 하찮은 미물도 다 비어 있는 것이다. 비어 있어야만 합생(合生)이 가능하고 타자의 포용이 가능하고, 다(多)를 일(一)로 통합하여 포일(包一)시키는 창조적 전진이 가능하다.
노자 <<도덕경>>을 다 읽으며, 배철현 교수가 언젠가 소개한, 레바논 시인 칼릴 지브란의 <눈물과 미소>를 공유한다. "자연은 하나인데, 인간은 인위적으로 둘로 가른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 남과 북, 동양과 서양, 남과 여, 부모와 자식, 처음과 나중, 위와 아래. 둘로 가르는 행위는 하나로 태어난 우리는 자신이 타인과 하나, 우리가 저들과 하나라는 사실을 인생의 우여곡절을 통해 서서히 깨닫는다." 강의 물은 하염없이 흘러가 바다가 되고, 그 곳에서 하늘로 증발하여 잠시 구름 안에서 머물다, 우주를 관장하는 바람의 신 엔릴이 물을 자연에 뿌릴 것이다. 오늘 시처럼, 물을 머금은 눈물이 시간이 지나면 흐뭇한 미소가 된다고 노래한다.
눈물과 미소(A Tear and A Smile)/칼릴 지브란
저는 심장을 애이는 슬픔을
대중의 기쁨과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슬픔이 제 모든 부분에서 흘러내리도록 만드는
눈물이 실없는 웃음으로 변질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제 삶이 눈물과 미소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심장을 정화하고
삶의 비밀과 감추인 것들을 이해하는 눈물.
저는 저와 같은 아들들에게 접근하여
제 방식으로 신에게 영광을 올리는 상징인 미소.
아픈 심장을 지닌 자들과 저를 하나게 되게 만드는 눈물,
제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표시인 미소.
저는 차라리 지치고 절망하며 사는 것보다,
그리워하고 바라다 죽겠습니다.
저는 제 영혼의 깊은 곳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에
굶주리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삶에 만족한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란 사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워하고 바라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가장 달콤한 선율보다 달콤합니다.
저녁이 다가오면, 꽃은 자신의 그리움을 껴안고,
자신의 잎을 접고 잠에 듭니다.
아침이 다가오면, 그녀는 잎을 열고
태양과 입을 맞춥니다.
꽃의 삶은 바램과 성취입니다.
눈물과 미소입니다.
바다의 물들은 수증기가 되어 올라
함께 모여 구름이 됩니다.
그리고 구름은 친절한 산들바람을 만날 때까지
언덕과 계곡 위에 둥둥 떠있습니다.
그런 후 들판 위로 울면서 떨어져 시냇물과 강물과 합류하여
바다로 돌아옵니다. 바다가 고향입니다.
구름의 삶은 떠남과 만남입니다.
눈물과 미소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위대한 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
물질세계로 움직입니다.
구름으로 슬픔의 산을 지나고
기쁨의 평원을 지나 죽음의 산들바람을 만나
자신이 온곳으로 돌아갑니다.
사랑과 아름다움이란 바다로, 신으로 돌아갑니다.
다음은 인터넷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천재들이 재물에 대한 욕심만으로 창업을 했다면 오늘날의 실리콘밸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발명이 좋아서 발명에 열중했고, 컴퓨터가 좋아서 컴퓨터에 매달렸다. 매달리다 보니 혁신을 하게 되었고, 그 혁신이 모여 실리콘밸리를 만들었다. '부(富)'는 혁신의 결과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이다. 만일 그들이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혁신기술을 추구했다면 그 부를 결코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천재는 없다. 그들은 성공한 후 자신이 일군 부를 대부분 사회에 환원했다. 빌 휴렛이 그랬고, 빌 게이츠가 그랬고, 마커 저크버그가 그랬고, 제프 베조스가 그랬다. 오늘 이 시간에도 실리콘밸리에는 혁신기술에 대한 다툼이 치열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부'에 대한 ‘부쟁지덕’이 자리 잡고 있다. 혁신기술이 도(道)가 될 수 있고 실리콘밸리가 ‘곡신불사’의 계곡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의 남은 삶의 지표로 <<도덕경>을 읽고 쓴 <인문 일지>를 자주 꺼내 읽을 생각이다.
다음은 제81장을 원문과 번역이다.
信言不美(신언불미) 美言不信(미언불신) :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않다.
善者不辯(선자불변) 辯者不善(변자불선) : 선한 사람은 변론하지 않고, 변론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좋은 사람은 따지지 아니하며, 따지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좋지 아니하다.)
知者不博(지자불박) 博者不知(박자부지) : 참으로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하여 떠 벌이는 사람은 참으로 알지 못한다.
聖人不積(성인부적) 旣以爲人(기이위인) 己愈有(기유유) : 성인은 쌓아 놓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베풀지만, 더욱 더 많이 가지게 된다.
旣以與人(기이여인) 己愈多(기유다) : 사람들과 더불어 쓰지만, 더욱 더 많아진다.
天之道(천지도) 利而不害(이이불해) :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롭게 하지 않는다.
聖人之道(성인지도) 爲而不爭(위이부쟁) : 성인의 도는 일을 도모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성인의 도사람을 위해 잘 하면서도 사람과 다투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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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표 교수 |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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