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올해는 다묵(多默, 도마)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한 지 110주년이 되는 해다. 1879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조선왕조의 백성으로 태어난 그는 1897년에 대한제국의 신민이 되었다가 그로부터 얼추 13년이 지나 대한제국이 문을 닫자, 나라와 운명을 함께한 ‘영웅’ 이다.
우남 이승만(황해도 평산 출생)보다는 네 살 아래요, 도산 안창호(평남 강서 출생)보다는 한 살 아래이며, 만해 한용운(충남 홍성 출생)과는 동갑이요, 단재 신채호(충남 대덕 출생)보다는 한 살 위다.
이렇게 걸출한 인물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태어난 그는, 그러나 그들과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말하자면, 다른 이들은 한일병탄과 ‘더불어’ 존재감이 두드러졌지만, 안중근은 한일병탄에 ‘앞서’ 일본 제국주의의 수뇌를 직접 처단함으로써 ‘동양평화’를 이루고자 한 ‘행동파’라는 점이 확연한 차이다.
행동파로서 그의 면모는 어린 시절 일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부친 안태훈 베드로는 “여덟아홉 살에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였고, 열서너 살 때에는 과거 공부와 육체(六體)를 마쳤다” 는데, 안중근은 책상머리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그보다는 총을 메고 산에 올라 사냥하는 걸 즐겼다. 친구들이 “너의 부친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너는 어째서 무식한 하등인이 되려고 하느냐?”며 공부를 권하자, 그의 대답은 이랬다. “너희들의 말도 옳다. 그러나 내 말도 좀 들어 보아라. 옛날 초패왕 항우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된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고 영웅 초패왕의 이름은 오래토록 남아 전해지고 있지 않느냐? 나는 학문을 닦아서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지 않다. 초패왕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 너희들은 다시 나에게 학업을 권하지 말아라.” .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하여 초패왕 항우를 들먹일 정도이고 보면 ‘무식한 하등인’은 결코 아닐 테다. 훗날 진남포로 이사한 뒤에는 전 재산을 정리해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운영하기까지 했으니, 교육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그의 기질은 어쨌거나 장부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 ‘상남자’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평생 동안 특히 즐기는 일이 네가지 있었다. 첫째는 친구와 의를 맺는 것이요(親友結義), 둘째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요(飮酒歌舞), 셋째는 총으로 사냥하는 것이요(銃砲狩獲), 넷째는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었다(騎馳駿馬).”
그러니 진득이 앉아 공부하는 게 적성에 맞을 리 없다. 그런 기질을 눌러줄 겸 이름을 무겁게(‘重根’) 지었건만, 사람의 타고난 성질을 바꾸기가 어디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하늘이 그를 그렇게 낸 것이다. 요컨대 그는 ‘천주인’(天主人)이었다. 천주인이란 좁다란 의미의 ‘천주교인’을 가리키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물리적 조건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사람, 동시에 자신이 그렇게 조건 지어진 데는 다른 뜻, 높은 뜻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안중근의 자의식은 이토록 드높고 광활했다. 그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동양평화’를 논하는 사상가로 우뚝 자랄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는 자신과 다른 성향을 타고난 아들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격려한 부친의 신앙바탕이 한몫을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2. 만국공법에 눈을 뜨다
1907년 정미7조약이 늑결(勒結)되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북간도로 건너가 의병을 일으킨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마당이니, 정식 군인이랄 수 없었으나, 면암 최익현 같은 양반도 70세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켜 노익장을 과시하는 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한데 안중근의 의병 활동은 최익현 유의 그것과 결이 달랐다. 최익현 유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면, 안중근의 경우에는 ‘만국공법’(萬國公法)에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하나의 일화를 들어보자. 그가 의병 참모중장(參謀中將)이 되어 함경북도에서 일본 군대와 격돌한 1908년 6월의 어느 날의 일이다. 포로로 잡힌 일본 군인과 상인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너희들은 모두 일본국 신민이다. 그런데 왜 천황의 거룩한 뜻을 받들지 않는가? 또한 러일전쟁을 시작할 때 선전문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굳건히 한다고 해 놓고 오늘날 이렇게 조선과 싸우고 침략하니 이것을 어찌 평화 독립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역적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냐?
여기서 안중근의 천황 인식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일 필요가 있다. 그는, 천황의 뜻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굳건히” 하는 것인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권력을 남용해 동아시아 전체가 위험에 빠졌다고 판단한다. 이는 일본제국의 문제가 천황제 자체에 있음을 간파하여 천황을 제거하고자 시도한 아나키스트 박열(朴烈, 1902-1974)이나 한인애국단 소속의 이봉창(李奉昌, 1900-193) 의사에 비하면, 한없이 얕고도 순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한계는 엄밀히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 하여튼 우리의 관심은 안중근의 만국공법 이해에 있으므로, 다시 1908년 6월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포로로 잡힌 일본 군인이 안중근에게 읍소하기를,
오늘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이토오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천황의 성지를 받들지 않고 제 마음대로 권세를 주물러, 일본과 한국의 귀한 생명을 무수히 죽이고, 저는 편안히 누워 복을 누리고 있으니 우리들도 분한 마음이 치솟고 있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어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이라고 어찌 역사의 옳고 그름을 모르겠습니까? 더구나 농사짓고 장사하는 백성들로서 한국에 건너 온 사람들은 형편이 더 어렵습니다. 이렇게 나라에 폐단이 생기고 백성들이 고달픈데 어떻게 동양평화가 이루어지며 일본이 편안해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안중근은 그들을 살려 보내기로 한다. 게다가 그들이 본래 소지하고 있던 총포까지 돌려준다. 나중에 장교들이 어째서 적들을 도로 놓아주었냐고 불평하자, 이렇게 대답한다.
현재 만국공법(필자의 강조)에는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라는 법이 없다. 적당한 곳에 가두어 두었다가 나중에 배상을 받고 돌려 보내기로 되어 있다. 더구나 그들이 하는 말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의로운 말들인지라 놓아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설득될 장교들이 아니다. 적들은 의병을 잡기만 하면 모조리 참혹하게 죽이는데,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낸다.
그렇지 않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적들이 그렇게 폭행을 자행하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다 함께 분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마저 저들과 같은 야만적인 행동을 해야만 하겠는가? 또 그대들은 일본의 4천만 인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는가? … 지금 우리는 약하고 적은 강하니 악전고투 할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충성된 행동과 의로운 거사로 이토오의 포악한 정략을 성토하여 열강의 호응을 얻어야 우리의 한을 풀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에 대적한다는 것이다.
만국공법을 믿었기에, 나아가 만국공법의 밑절미는 하나님의 높은 뜻이라고 믿었기에 안중근은 부하들에게 “야만적인 행동”을 삼가도록 권면한다. 천생 ‘천주인’으로서 그의 도덕이 성서에 기초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5:20)고 가르치거나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고 기도한 예수의 마음을 보는 듯하다.
해서 안중근이 1909년 10월 26일 오전 10시경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개인적 원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심지어 억압당하는 민족의 분노 때문으로 단순 환원될 성질도 아니다. 그의 ‘의거’는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함이요,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는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에게는 군국주의 망령에 사로잡힌 일본제국의 중심부에서 전쟁의 총알받이로 산화할 운명에 처한 일본의 하층민들도 사랑의 대상이었다.
3. 만국공법의 허상과 위선
그렇다면 만국공법이란 무엇인가? 만국공법은 미국의 법학자 헨리 휘튼(Henry Wheaton‚ 1785-1848)이 쓴 ‘국제법’ 저서의 한역(漢譯) 제목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평등을 전제로, 만국(萬國)이 공법(公法)에 의해 국가간 행위를 도모하고 규제하도록 지시하는 제도적 장치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청나라가 1842년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하던 때, 공문서에 ‘오랑캐’를 뜻하는 ‘이(夷)’자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지당한 것도 만국공법에 따른 조치였다. 한데 청국의 입장에서는 난징조약이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강요된 ‘불평등조약’이었으므로, 이 점을 생각하면 만국공법체제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따져 묻게 된다. 당시 서구제국주의가 주도하던 국제질서의 교활한 꼼수가 엿보인다는 말이다.
휘튼의 저서를 번역하여 청국에 소개한 이는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 1827-1916)이다.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1864년에 번역 출간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만국공법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일본은 『만국공법』이 중국에서 출간된 1년 후인 1865년에 이 책을 수입하여 간행하였고, 1868년에는 아예 휘튼의 영문원전을 직접 일본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치르고도 중국이 여전히 중화주의의 늪에 빠져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일본은 발 빠르게 만국공법체제를 활용하여 차근차근 ‘탈아입구(脱亞入歐)’ 프로젝트를 추진해 나갔다.
1860년대 일본의 2대 베스트셀러가 휘튼의 『만국공법』과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서양사정(西洋事情)』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 근대화의 주역으로 ‘탈아론’의 주창자인 후쿠자와는 1862년에 미국과 유럽을 둘러보고 돌아와 4년 뒤에 『서양사정』 초편을 내놓았다. 이어서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68년에 또 다시 외편을, 그리고 1870년에 2편을 더 내놓아 미국과 영국의 정치 및 역사 등 ‘서양사정’을 일본에 알리는 데 주력했다. 주요 골자는 일본도 미국과 유럽처럼 ‘문명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조선에 『만국공법』이 소개된 것은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이듬해 일이다. 초대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예조판서 조영하에게 강화도조약을 잘 준수하라며 학습용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이는 표면상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인정하는 제스처인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전혀 달랐다. 영국이 청국에게 ‘만국공법’을 빌미로 난징조약을 체결하여 본격적인 수탈에 나섰듯이, 일본도 조선에 대해 똑같은 순서를 밟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만국공법은 세계의 국가들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눈다. 정치적으로 완전한 승인을 확보한 문명국, 부분적 승인을 확보한 반미개국, 그리고 단순히 인간으로서만 승인된 미개국이다. 이 가운데 만국공법이 적용되는 범주는 당연히 문명국이다. 야만적인 미개국은 만국공법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어 문명국의 도움으로 야만성에서 벗어나는 게 자국에게나 인류 전체를 위해 더 좋은 일이다. 이렇게 ‘문명 대 야만’의 이분법으로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논리를 제공한 것이 만국공법의 숨은 공로였다. 달리 말하면, 화이관(華夷觀)의 서구 버전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만국공법에 기대어 조선왕조를 개조하려 한 개화당의 한계는 뚜렷한 셈이다. 이들이 모방하려던 문명국의 모델은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이미 메이지유신에 성공해 서구적 근대화를 이룬 일본, 오랜 세월 조선의 ‘보호국’ 노릇을 했던 중국마저 발아래 무릎 꿇릴 만큼 무서운 강국으로 성장한 일본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데 일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어땠나? 당시 일본 본토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으로 시끄럽지 않았던가?
미국과 맺은 불평등조약(1858년)을 개정하기 위해 이와쿠라(岩倉具視) 사절단이 미국을 찾아간 것이 1871년 11월이다. 1872년 1월 그랜드 미국 대통령을 예방했지만, 일본에는 아직 헌법이 없고 사법 시스템 또한 구미 각국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평등조약 개정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일본의 자존심에 ‘트라우마’(trauma)를 남긴 사건이다. 이 트라우마가 엉뚱한 쪽으로 물꼬를 트니, 1873년을 뜨겁게 달군 정한론이 그것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돌 던진다고, 미국에다 분풀이를 하는 대신에 아직 ‘미개국’ 수준인 조선부터 정벌한 뒤 그 다음을 기약하자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그 다음이 무엇인지는 1941년에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한 사건으로 확연해졌다.) 메이지유신이 일어나 할 일이 없어진 사무라이 계급의 반발을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해, 지금은 외정(外征)에 나설 때가 아니라 내치(內治)에 신경 쓸 때라는 말로 정한론을 폐기시키기는 했지만, 영구적인 결정은 아니었음을 역사가 입증한다. 이후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수장으로 의회를 설립하고 헌법을 제정하는 등 착실히 근대국가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조건 구미의 정치제도를 모방한 것은 아니다. 메이지 헌법 제1조에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万世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는 조항과 제3조에 “천황은 신성하며 침범할 수 없다”는 조항, 그리고 제4조에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괄한다”는 조항과 제12조에 “천황은 육ㆍ해군의 편제 및 상비군의 숫자를 결정한다”는 조항을 못 박아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군국주의를 지향한 것이 일본식 근대국가의 본질이었다.
“이토가 일본의 헌법을 완성한 순간, 아시아의 고통이 시작”
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메이지 헌법 제1조와 제3조에 명시된 대로, 일본 황조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의 후예인 천황은 그 자신이 이미 신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내각의 재가 없이도 얼마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다. 게다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잇단 승리는 일본에게 ‘군국(軍國)만이 살 길’이라는 신념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매복되어 있던 정한론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이때다. 러일전쟁이 끝난 직후 일본은 곧바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 스스로 설 수 없는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 강국의 자애로운 책무라는 사회진화론적 논리로 무장한 채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는 데 5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4. 동양평화론, 어제와 이제의 의미
1909년 3월 2일 러시아 연해주의 대표적인 한인촌 연추(煙秋)에서 안중근은 김기룡(金基龍)·황병길(黃丙吉) 등 열한 명의 애국청년 동지들과 함께 단지회(斷指會)를 결성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와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암살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는 같은 해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 체포된 것이다.
그 다음은 불법과 파행이 난무하는 졸속재판의 연속이었다. 그는 곧바로 러시아 관리에게 취조받은 후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가 11월 1일에 뤼순으로 옮겨져 심문을 받았다. 1910년 2월 7일 1차 공판이 열린 이래, 14일 6차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대우받게 해달라는 안중근의 요청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일에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동포들에게 유언을 남긴 후, 17일부터 「동양평화론」 집필에 들어갔다.
항소를 포기한 그는 어머니 조마리아가 보낸 수의를 입고,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대에 올랐다.
사형을 선고받은 이가 어쩌면 이토록 담담하게 글을 쓸 수 있는가?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에 당당하게 항소를 포기하는 배짱은 또 어디서 나오는가? 그가 목숨과 맞바꾼 「동양평화론」을 탈고하였더라면 어땠을까? ‘서문’(序文)을 끝내고 ‘전감’(前鑑, 앞사람이 한 일을 거울삼아 스스로 경계한다)을 쓰던 중에 처형당했다. ‘현상’(現狀)과 ‘복선’(伏線), ‘문답’(問答)은 손도 대지 못했다. 천주인으로 태어나 천주의 품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서른둘이었다.
신앙인이 어떻게 남을 해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덮어두자. 윤리적 물음은 그렇게 진공상태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안중근이 제1차 공판 때 관동도독부지방법원장 마나베 주우조오(眞鍋十藏)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 데서 그의 ‘의거’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난다.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 전쟁을 하얼빈에서 전개하여 이토오를 죽인 것이지, 결코 나 개인으로서 결행한 것이 아니다.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실행한 것이므로 실제로는 포로로 취급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하나의 살인 피고인으로 이곳에서 취조를 받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의 행위에 대해 굳이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면, 이렇게 물어보아야 한다. 군인이 적장을 살해한 행위는 정당한가?
말 그대로, 그는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다. ‘대동아공영’이라는 제국주의 논리의 허구와 위선을 밝히고 진정한 ‘동양평화’를 이루려면 한국의 독립이 선결되어야 함을 만국공법의 논리로 설득하고자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이 미완의 글에서 그는 상대방(일본)을 설득하기 위한 수사학적 기술의 하나로 인종주의(racism)를 활용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예로부터 동양의 민족들은 오로지 문학(文學)에만 힘을 쓰고 자기 나라만 조심스레 지킬 뿐, 유럽의 한 치의 땅도 침입해 빼앗지 않았다는 … 그런데 최근 수백년 사이에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도덕을 까맣게 잊고 나날이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심을 키워, 조금도 거리끼는 바가 없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가 가장 심한 나라”인데, “이에 하늘에서 한 마무리를 짓기 위해 동해에 떠있는 조그만 섬나라 일본으로 하여금 그같은 강대국 러시아를 만주 대륙에서 한 주먹에 때려 눕히게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순리에 따르고, 땅의 배려를 받고, 인정에 응답하는 이치”
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과장된 수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정작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데는 한국과 청국 두 나라 국민의 도움이 있었음을 잊지 말라는 경고성 발언이다.
한청 양국 국민은 … 일본 군대를 환영하고 운수(運輸), 치도(治道), 정탐(偵探) 등의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고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였는가? …
하나는,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開戰)할 때 일본 천황의 선전포고문 중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했으니 이같은 대의가 맑은 하늘의 태양빛보다 더 밝아, 한국과 청국의 국민들은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한 마음이 되어 이를 믿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일본과 러시아의 싸움이 황색 인종과 백색 인종의 경쟁(필자의 강조)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지난 날의 원수 같던 감정은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오히려 하나의 커다란 인종 사랑으로 바뀌었으니, 이것 또한 인정의 순리이며 합리적인 이유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은 “수백 년 동안 악을 자행해 오던 백인종의 선봉대를 북소리 한 번에 크게” 부순 사건이야말로 “천고에 희귀한 일이요, 만국이 기념할 자취”라며 한껏 추켜세운다.
하지만 곧이어서 그렇게 “위대한 공로” 를 세운 일본이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하고, 같은 인종인 한국인을 억압”하고 있으니 “용과 맹호의 위세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꾸짖는다.
요컨대 한·중·일이 서로 손을 잡지 않으면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西勢東漸) 환난” 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다. 안중근은 일본에게 “백인의 앞잡이” 가 되지 말고 ‘동양평화’에 헌신하라고 주문한다. 주목할 점은 이 대목에서 그가 표적으로 삼고 있는 ‘백인’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일본이 러시아를 끝까지 압박해 화를 뿌리째 뽑아버리지 않고 “은밀하고 궁색하게 먼저 강화를 요청”한 것이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며 운을 뗀다.
더구나 러일 강화 담판을 벌일 장소로 미국 워싱턴을 정한 것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통탄해 마지않는다.
“고무라(小村壽太郎) 일본 외상이 구차스럽게 수만리 밖의 워싱턴까지 가서 강화조약을 체결”하니 미국 대통령이 “노련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고무라 외상을 농락하여 바다에 떠 있는 섬의 약간의 땅조각과 파선, 철도 등 잔물(殘物)들을 배상으로 나열하고 거액의 배상금은 전부 파기시켜” 버린 것이 아니냐며, “만일 이때 일본이 패하고 러시아가 승리해서 담판하는 자리가 워싱턴이었다면 일본에 대한 배상 요구가 이처럼 약소했겠는가?” 울분을 터뜨린다.
안중근의 노골적인 인종주의는 오늘의 시각에서 불편한 감이 있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 아베와 트럼프가 ‘짬짜미’를 하며 한반도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오늘의 현실을 되짚으면, 그의 발언이 결코 격하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아니 오히려 예언으로까지 들린다. 안중근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에 대해 저리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가 개신교인이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한국개신교는 이른바 ‘복음의 빚’을 가장 많이 지고 있는 미국에 대해 손톱만큼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한국개신교의 고질병인 숭미주의가 오늘날 보수 기독교인들의 극우 정치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적 자산임을 생각할 때,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개신교적 독해가 묵직한 숙제로 남는다.
5. 나가는 말
그가 몸담은 시대는 ‘사회진화론’이 풍미하던 때였다. ‘문명한 시대’이기는커녕 이른바 상등사회의 고등 인물들은 의논한다는 것이 오로지 사람 죽이는 기계뿐이요, 그래서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끊일 날이 없는 그런 때였다. 하여 기적은 바랄 수조차 없었다. 독일의 ‘천주인’ 디트리히 본회퍼가 1945년 4월 9일, 연합군이 당도하기 겨우 한 달 전에 형장의 이슬로 속절없이 스러졌듯이, 안중근도 예정대로 사형당했다. 마지막 유언을 묻는 간수에게 “이 기회에 임하여 동양평화의 만세를 3창하고자 하니 특히 청허있기 바란다고 하였으나, 당연히 거절당했다.
본래 그가 원한 사형집행일은 3월 25일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하루 더 지난 3월 26일, 그것도 오전 10시 4분에 안중근을 처형하였다. 다섯 달 전인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숨을 거둔 시간에 맞추려는 철저한 보복심리였다.이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성 금요일이었다.
그러니까 안중근은 천생 ‘천주인’이었던 셈이다. 자기 죽음을 십자가의 빛에서 해석한다. 그에게 교수단(絞首壇)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 “성단”(聖壇)이었다. 감옥에서 죽음이 한 발 두 발 다가오는 중에도 자신을 무료 변호했던 미즈노(水野吉太郞) 변호사에게 회심을 일으킨 일화는 바울 사도를 떠올리게 한다.
이쯤에서 ‘천주교인’ 안중근에 대해서도 몇 마디 보태자. 그는 부친을 따라 1896년에 프랑스 선교사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홍요셉 혹은 홍석구, 1860-1936)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귀의했다. 그러나 이때의 천주교가 어느 수준이었던가? 빌렘 신부가 안중근의 제안으로 뮈텔(Gustave-Charles-Marie Mutel, 민덕효 1854-1933) 주교를 찾아가 대학교 설립을 제안하자, 뮈텔이 말하기를 “만일 한국인이 학문을 배우게 되면 천주교를 믿는 데 소홀해 질 것이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했다는 것 아닌가?
이에 안중근은 맹세한다. “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마음은 믿지 않겠다” 고. 그리고는 프랑스 말을 배우던 것도 중단하고 만다. 외국말 배우기는 당시 성공과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심지어 서양 선교사에게 말을 배우기 위해 서양종교를 믿는 이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중근의 생각은 확고했다.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종놈이 되고, 영어를 배우는 자는 영국의 종놈이 된다. 내가 만일 계속해서 불어를 배우다가는 프랑스의 종놈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보편’진리를 가장한 로마 가톨릭은 이 땅의 ‘특수’역사에 눈을 감았다. 인종차별에 가까운 무시와 모욕으로 일관했다.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으로 손꼽히는 ‘105인 사건·삼일운동·신사참배 거부운동’이 모두 개신교인들에 의해 주도된 점을 떠올려 보라. 당시 천주교의 몰역사성을 곱씹게 하는 표징이다.
일본 정부를 의식한 뮈텔은 안중근을 일방적으로 출교시키고,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의 ‘살인행위’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선을 그었다. 처형을 앞둔 안중근이 종부성사를 받기 원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정당한 바람을 간단히 외면했다. 심지어 자신의 허락 없이 자발적으로 안중근을 찾아간 빌렘 신부를 징계하기까지 했다. 그러고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모임에 당당히 참석하는 극악무도함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친일행각은 제국주의와 야합한 종교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평화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중립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 침묵과 중립은 강자를 옹호하는 무책임한 변명으로 전락하기 쉽다.
평화는 소리치는 것이다. 어느 한 편을 드는 것이다.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부당한 폭력에 온몸으로 저항하지 않는 한, 평화는 오지 않는다. ‘짝퉁’ 평화만 넘실거리게 된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태복음 10:34)는 예수의 말씀이 참인 것은 그런 맥락이다. 제국주의, 전체주의, 국가주의 등 인간을 노예화하는 모든 이데올로기를 결연히 끊어내야 한다. 여기서 평화는 자유의 옷을 갈아입는다. 갑의 자리가 주는 달콤함에 취해 을의 고통을 느끼지조차 못하는 불감증에서 깨어나려고 부단히 몸부림칠 때, 평화는 평등의 다른 이름이 된다. 안중근은 그런 평화의 길을 닦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태복음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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