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미쉬파트'란다. 그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
-'마아트'는 우주의 균형이자 원칙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조화이다
-선행이란 나의 행위가 타인의 입장에서 향기로운가를 묻는 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영어로 'I'm nothing'의 상태가 되어야 아가페, 헤세드의 사랑이 시작된다.
어제 아침은 고향에 벌초를 하러 가는 바람에 <인문 일지> 공유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어제 것과 오늘 것 두 개를 공유할 것이다.
벌초(伐草)는 한식(寒食)이나 추석 성묘 이전에 조상의 묘에 자란 풀이나 나무를 베어 깨끗이 하는 일로 대개 백중(百中) 이후부터 추석 전에 벌초를 마친다. 처서(處暑)가 지나면 풀들이 대부분 성장을 멈추고 더 자라지 않기 때문에 이 무렵에 벌초를 해야 비교적 오랫동안 깨끗하게 묘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추석까지 벌초를 하지 않는 산소를 보면 동네 어르신들이 후손들에게 욕을 하게 된다. 처서(處暑)가 되면 모기 입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들판의 벌레들도 임무 교대를 한다. 매미 소리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며 대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인문 운동가로 벌초와 관련된 말들을 살펴본다. 마침 한 단체 카톡(왕원근)에서 배웠다. 나는 <인문 일지>를 공유하느라고, 단체 카톡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정보와 의견 교환을 한다. 많은 시간을 내지 못하지만, 어쩌다 좋은 내용이 나오면, 캡처하여 내 <에버노트>에 저장해 두었다가, 한가한 시간에 다시 읽는다.
'벌초'는 무덤의 풀을 깎아 깨끗이 한다는 뜻으로, 정벌(征伐)에 나선 병사가 창을 든 사람 모습이다. '벌(伐)'자는 전쟁에서 적군을 베듯 과감하게 풀을 벤다는 뜻이라 했다. 그리고 '금초(禁草)'라는 말도 하는데, '금화벌초(禁火伐草)'의 준말로서, '무덤에 불이 붙지 않게 가연성 풀을 제거하고, 때맞추어 풀을 베어 잔디를 잘 가꾼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 했다. 그리고 그때 사용하는 기계를 예초기라 하는데, '예초(刈草)'는 무덤뿐만 아니라 정원이나 논밭 등에 자라나 있는 잡초를 벤다는 뜻이라 했다. 요즘은 낫으로 풀을 베지 않고 기계로 하는데 풀을 베는 기계를 '예초기(刈草機)'라고 한다. 그리고 '사초(莎草)'라는 말도 하는데, 그것은 '오래되거나 허물어진 무덤을 보수하고 떼를 입혀 다듬는 일을 이르는 말'이라 했다.
또한 '성묘(省墓)'는 뜻이 조금 다르다는 거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뵙는 것을 귀성(歸省)이라 하는데 이는 '귀향성묘(歸鄕省墓)'를 줄인 말이라 했다. 그러니까 '성묘'는 명절이나 한식(寒食) 같은 절기에 조상의 묘를 찾아가 손질하고 살피는 일이다. 따라서 추석에는 아침에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조상묘를 찾아 성묘를 한다. 성묘와 벌초의 차이는 설과 한식에는 성묘는 하지만, 벌초는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설은 겨울이라 벌초할 필요가 없고 한식도 풀이 자라나지 않아 벨 풀이 없다. 다만 한식에는 봉분이 무너진 곳을 수리하거나 말라버린 떼를 다시 입혀주는 사초(莎草)를 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전통을 없애려 한다는 거다. 우리 사회가 여러 부분에서 비틀거린다.
현재 우리 사회의 위기 핵심은 자리에 걸맞은 능력과 책임감이 모자란 사람들이 너무나 중요한 자리를 뻔뻔하게 꿰차고 있다는 점이다. 이끌지도 못하면서 떠나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를 이끄는 주류 의식을 자각하고 있는 주체가 확실하게 없다. 비전도, 전략도, 리더십도 없이 '처삼촌 묘 벌초하듯' 시늉만 내는 비주류의식에 모두가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지금 꿈도 잃고, 힘도 잃고, 길도 잃었다. 비전을 다시 만들고, 주류의식을 갖고 이 사회를 이끌며 결정하는 힘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정치 전문가가 다시 나와야 한다. 누구나 해도 되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정치이다. 시를 한 편 공유하고, 이젠, 어제에 이어 <아이에카(ayyeka)와 마아트(maat)>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2) 오늘 공유하는 시의 "나비"처럼 살고 싶다. 어제 고향에 가, 오랫동안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왔다.
나비는 길을 묻지 않는다/박상옥
나비는 날아오르는 순간 집을 버린다.
날개 접고 쉬는 자리가 집이다.
잎에서 꽃으로 꽃에서 잎으로 옮겨 다니며
어디에다 집을 지을까 생각하지 않는다.
햇빛으로 치장하고 이슬로 양식을 삼는다.
배불리 먹지 않아도 고요히 내일이 온다.
높게 날아오르지 않아도 지상의 아름다움이
낮은 곳에 있음을 안다.
나비는 길 위에 길을 묻지 않는다.
아이에카(ayyeka)와 마아트(maat) (2)
'마아트'는 우주의 균형이자 원칙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구성원들의 조화이다. 또 그것은 개인의 일생에 있어서 반드시 추구해야 할 최선의 삶이기도 하다. 이 '마아트'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던진 첫 질문 '아예카(너 어디 있는냐?)'에 대한 응답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처해진 삶의 상황에 지혜롭게 대응하여 삶의 중심을 찾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의 질문에 답하는 인간의 숭고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삶의 중심점, '마아트'는 무엇일까?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추구하며, 겸손하게 네가 만난 신이 요구한 대로 생활하는 것"이라는 <미가서>의 내용이 나의 마아트이다. 맛있는 반찬을 만나면, 씹으면 씹을수록 더 맛이 나는 것처럼, 예언자 미가가 말한 위의 문장은 곱씹을수록 더 큰 깨달음을 준다. 정의 실천, 자비 추구 그리고 겸손 생활이 선행(善行)이라는 거다. 예언자 미가는 신이 원하는 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선행이라고 고언을 했다. 그 선행이란 나의 행위가 타인의 입장에서 향기로운가를 묻는 일이다. 미가는 우리가 가장 매력적인 향기를 잔잔하게 내뿜을 수 있는, 인향(人香)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해주었다. 늘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동물적인 인간에게서 신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 정의 실천하기
▪ 자비 희구하기
▪ 겸손 생활하기
(1) 정의(正義) 실천: 정의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미쉬파트'란다. 그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보면, '공평하게 판단하다, 재판하다'이다. 그러니까 '미쉬파트'의 소극적 의미는 잘못된 행위에 대해 그에 해당하는 동일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에 대한 벌을 넘어 사람들 각자에게 걸맞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성서는 지속적으로 미쉬파트는 '과부, 고아, 이민자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과 그들의 바람을 사회에서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임을 이야기 한다. 오늘날은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한 부모가정, 노인계층이 포함된 기초생활자, 차상위 계층 등이 바로 이 미쉬파트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사회의 성숙도와 정의 실현 정도는 순전히 그 사회가 이 계층을 어떻게 대하느냐 에 달려 있다. 이 계층에 대한 소홀이나 무관심은 자비의 부족이 아니라, 신의 제1명령인 '미쉬파트'를 범하는 죄악이다. 신이 인간에게 원한 첫 번째 명령,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첫 번째 선은 사회의 취약 계층을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위대한 신을 위한 '예배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평상시의 작은 선행이 성전에서의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다.
(2) 자비 희구(慈悲 希求)를 히브리어로 하면, '아하보쏘 헤세드'라 한다. '아하보쏘'는 보편적으로 '사랑하다'로 해석한다. 특히 '인간들 간의 사랑, 즉 부부, 자녀, 친구들 간의 사랑과 우정 혹은 신에 대한 인간의 정성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적인 감정이 내포된 상대방에 대한 관심으로 '희구(希求)'로 번역할 수 있다. 헤세드(chesed)는 현대어로 번역하기 어렵지만, 보편적으로 '인애(仁愛)'라고 해석하고 영어로는 'steadfast love(변치 않는 사랑)', 'kindness(친절)'로 번역된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충성이나 사랑이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랑으로 한자로 표현하면 '총애(寵愛)'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스어로 아가페(agape)이다.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응원하고 믿어주고 끝까지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다. 신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데, 신은 그런 사랑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기도 하다. 이때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리는 '무아'의 상태로 진입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영어로 'I'm nothing'의 상태가 되어야 아가페, 헤세드의 사랑이 시작된다. 모든 인간의 생존은 바로 어머니의 헤세드를 통해 가능하게 되며, 어린 아이는 어머니를 통해 헤세드가 인간이 단순한 동물이 아닌 신적인 존재로 도약하게 하는 이타적 존재라는 사실을 서서히 배운다. 신은 우리에게 자기 희생적 사랑을 목표로 삼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경주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정의는 실천하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인 헤세드는 희구(希求)하라는 명령이다. '희구하라'는 말의 뜻은 '바라서 요구함'이다. 그러니까 헤세드를 원하고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자신에게 요구하라는 말이다. 희구의 비슷한 말은 간구(懇求)이다. 간구는 '간절히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 구함'이란 말이다. 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삶을 갈구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헤세드는 관심의 단계를 넘어선다, 그것에는 베푸는 주체와 받는 주체가 일치해 상대방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동반된다. 아파하는 갓난아기의 고통을 어머니도 느끼듯이 인간은 헤세드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나의 삶으로 인식한다. 신은 그런 삶이 어렵다고 판단해 헤세드를 '희구하고 간구하라'고 주문한다는 거다.
(3) 겸손(謙遜) 생활 :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만난 신의 명령에 따른 겸손 생활 하기'이다. 겸손은 자기 비하적인 면과 동시에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시발점이다. 강과 바다가 백 개의 계곡 물을 다스릴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계곡 물보다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리더들이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여 자신을 낮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은 인간이 겸손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가 "내가 아는 사실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다"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 인간은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 생명의 오묘함을 완벽하게 알 수 없고, 단지 그 지극한 일부만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근본은 삼라만상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일일 뿐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직업, 명성 그리고 재산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혹은 남에 의해 강요된 신을 숭배하고 그 신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교리'라는 이름으로, 신봉하며 예배를 드리고, 그 종교가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일생을 산다. 신은 우리 모두에게 먼저 '자신만의 신'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신을 찾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바로 신을 만나는 지름길이 때문이다. 그 신을 찾게 되면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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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표 교수 |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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